나는 미쳐있다. 미쳐있다는 것을 안다. 알 수 있음은 내 생각을 읽어만 보아도 안다. 지나치는 생각들, 잠시 불이 지펴졌다 사라지는 생각들, 과거의 생각들, 분노에 휩싸이면 드는 생각들, 누군가를 비난하는 생각들. 모든 생각을 하나씩 곱씹어 보고 다시 들여다본다면 내가 미쳐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미쳐있다고 한다. 미쳐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미친 것이다. 쉽게 생각하는 미치다. 광인. 현대사회에선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는 사람으로 치부하지만 오히려 현대사회이기에 미치광이의 범위는 더욱 확장된다. 미쳐있다는 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인간이기에 그런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미쳐있는 상태.
내가 미친 존재라는 것을 안 지는 얼마 안 되었다. 하루 안에 그러니까 24시간 안에 그리고 그 보다 절반인 그리고 그보다 더 절반인 단 몇 시간 안에 연속된 죽음을 보았다. 교통사고 심근경색 뇌출혈 자살 약물중독. 일하는 동안 연속된 죽음의 대지에서 나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웃음. 죽은 자는 죽은 자였고 나는 죽음에 빠져들 수 없었다. 돌봐야 하는 사람은 줄을 섰고 나에겐 그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죽음은 명백한 죽음이었다. 생물학적 사망상태. 사망시간을 과장들은 선고했다.
OOOO 년 O월 O일 OO시 OO분 OOO의 사망을 선고합니다. OOOO 년 O월 O일 OO시 OO분 OOO의 사망을 선고합니다. OOOO 년 O월 O일 OO시 OO분 OOO의 사망을 선고합니다. OOOO 년 O월 O일 OO시 OO분 OOO의 사망을 선고합니다. OOOO 년 O월 O일 OO시 OO분 OOO의 사망을 선고합니다.
다섯 번의 죽음. 다섯 번의 선고. 다섯 번의 사후처리. 다섯 번의 서류 작업. 다섯 번의 운구. 그 간격과 그 틈 속에서 나와 동료들은 웃음 짓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망자에 대한 비 애도적 태도나 비웃음 혹은 사망을 하찮게 하는 것에서 오는 태도가 아니다. 사망을 그저 생물학적인 사망상태라는 것만 알뿐이다. 죽음에 우린 공감할 수 없고 공감해서는 안된다. 밀려들어오는 시간의 흐름에 정신을 맡긴 채 해야 할 일을 해낼 뿐이었다. 프로답게. 해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거대한 슬픔의 파도가 덮쳐와도 우리의 일 속에서 웃음이 있었다. 단지 다섯 번의 죽음이 그 짧은 여덟 시간 안에 있던 것이다. 나는 그 형태에서 그 웃음에서 나의 광기를 보았다. 죽음 옆 웃음. 나는 분명 웃고 있었다.
이쁜 만인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참사와 지속되는 비극의 참극 속에서 역시나 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슬픔 애도 비참은 잠시였고 그런 가운데 안도감을 느끼고 희비에서 나는 희임을 인지했다. 나의 광기는 어느 순간에나 존재했다. 아니 유독 누군가의 비극에서 나는 나의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알게 되면 그것은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그 상념에 사로잡히고 먹힐 때도 있다. 그럴 때, 내가 미쳐있다고 느낄 때 입을 닫는다. 위험하다 현재의 나는. 미쳐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사회적 동물이기도 한 나는 그것을 숨기고자 한다. 나의 미침이 누군가에게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미침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니까.
사람만이 미쳐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동물이나 식물 생명이 있다고 알고 있는 어떤 존재에서 그 존재 스스로 거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절대 알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생명이 있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스스로 미쳤다는 것을 인지했음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미쳤기에 인간일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은 모두 미쳐있다고 얘기했다. 미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미친 것이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것 자체도 미친 것이다. 인간은 미쳐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파수꾼이자 등대지기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진실로 미쳐있으니까. 어떤 말은 하는 것도 미침의 일종이다.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어떤 것에 대해 깊이 믿기 때문이다. 깊이 믿는다는 것 역시 누군가에겐 미친 것이다. 혹은 어떤 것에 미친 것이다.
나는 아침을 꼭 챙겨 먹는다. 미친 것이다. 나는 운동을 조금이라도 꼭 한다. 미친 것이다. 서점에 가면 책을 잔뜩 사들이고 싶다. 미친 것이다. 멍하니 있는 것을 좋아한다. 미친 것이다. 내가 말하는 미쳐있는 상태는 꼭 혼돈의 상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맹신적이라 치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간은 사람은 자신의 언어와 행동에 근거하는 생각에 깊은 미침이 있지 않고서는 어떤 것이든 쉽게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없다. 혹은 그 반대여도 미친 것이다. 미쳐있는 것. 미친 것이 인간이고 사람은 미쳐있음에 당연하다. 내가 미쳐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가. 그렇다. 세상에 대해 그냥 그렇구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직 미약해서, 그러니까 내가 미쳤다는 것을 인지는 했지만 제대로 수용하지는 못해서 누군가의 미쳐있는 생각과 행동을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받아들이는 초인이 되기엔 멀었다. 뭐 그렇다고 초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광기 다른 이의 광기 모두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끊임없는 검열은 필요하다고 본다. 자신을 위한 검열. 자신의 미친 생각과 미친 행동을 누군가에게 투영하고 투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다른 영역으로 미쳐있기에. 그래서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OO하니 너도 OO 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서로의 미침은 상대에게 해당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미침의 종류니까. 자신의 미침은 자신이 감당해 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미침을 알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가볍고 무거울 수 있음을. 자신의 미침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쳐 혼란에 이를 수 있음을. 자신의 미침이 누군가에겐 생사의 기로에 설 수 있는 농담이 될 수 있음을. 자신이 미쳐있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나 자신에게 또는 어떤 존재에게 불행을 선사하지 않을 수 있기에.
아무리 미쳐있다 한들 서로에게 불행을 선사하는 존재라면 그릇 됐다. 불행을 안겨다 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 미쳐있다고 해도 불행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서로의 광기가 어우러져 행복을 자아내고 기쁨의 관계가 될 수 있다. 그런 경험은 수도 없이 했다. 불행을 주는 미친 존재라면 끊어내야 한다.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 아닌 나와는 다른 광기이기에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기에 겸손해야 한다.
사람은 실로 미쳐있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앎으로써 자신을 검열해야 한다. 검열함으로써 누군가에게 불행을 주면 안 되고 행복과 기쁨을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단지 내 생각이지만 단지 이 글도 내 미침의 일종이지만 최근 들은 생각 중에 가장 미친 생각 같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