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by 지우

불안. 불안은 무엇일까. 불안은 어디에서 근원 하는 것일까. 불안은 외부에서 불어 들어오는 바람과 같은 것일까. 불안은 내부에서 발현되는 돌 틈 싹 같은 것일까. 언제나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불안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중학생 시절 요리에 대한 꿈을 접고 나서는 불안에 떨며 삶에 지향성 따윈 던져 놓았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엔 흥미가 없어 대학교에 가지 못할 성적불안으로 대학진학포기라는 회피를 입에 달고 살았다. 군대에선 내 앞날이 너무나도 불안정하여 안개로 뒤덮인 길을 나가는 것만 같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학교를 졸업하며 입사할 회사가 결정되었음에도 낮은 자존감에 어딜 가도 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할 거야 라는 불안은 나를 점령했다. 그렇게 불안은 언제나 나의 곁에 있었다. 불안이 나의 곁을 떠난 적은 없었다. 나는 불안이었고 불안은 나였다.


불안. 그것은 무엇이길래 생의 전반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까. 불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몸소 경험하며 깨달은 뒤 너무나도 질긴 끈이 나와 연결되어 있어 어떤 것을 대하더라도 무기력해졌었다. 포기가 더 빨라 보였다. 포기는 너무나도 쉽다. 잊은 척하면 됐고 모르는 척하면 됐다. 포기라는 슬로건을 붙인 채 불안이라는 것에 잠식되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새벽까지 게임을 했다. 하지만 불안은 적응되기는커녕 느끼면 느낄수록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지배력이 더욱더 강해졌다. 무슨 조약을 맺은 것처럼 점점 더 불합리해졌다. 불합리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불합리적으로 세상을 판단했다. 불안은 어떤 것도 나에게 허용해 주지 않았다. 나의 몸. 나의 정신. 나의 과거. 나의 미래.


불안은 무형의 존재에 대한 혹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미시적임에 대한 마음의 흔들림이다. 그와 더불어 무형의 어떤 것에 대한 실체를 알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라는 근본적 깨달음을 얻게 되면 사실 별거 없다. 그래서인지 불안과는 달리 사실 나는 나만의 길을 걸어갔다. 요리를 포기했음에도 친구들과 즐거운 중학생시절을 보낸 기억이 가득하다. 공부를 분명 등졌음에도 원하는 학과에 진학했다. 군대에서는 수많은 책을 보고 꿈에 대해 다시 길을 정비했다. 그리곤 전역하기 전 요리에 다시 도전했다. 무작정 이태원에 있는 프렌치레스토랑에 문을 두드리고 일을 시켜 달라했다. 대학교 졸업 전 취업을 성공했고 무사히 배정받은 부서에서 7년간 근무하며 근무 책임자까지 무사히 수행했다. 정말 불안이라는 것에 항상 벌벌 떨며 모든 것을 잠식당한 것처럼 보였어도 정말 사실적으로 정말 객관적으로 나는 세상의 일원이었고 세상에 잘 녹아들었고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 주었고 나는 사랑받았다. 그것이 사실이자 진실이었다.


불안은 무엇일까. 실존하는 것일까. 불안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내 나이 서른셋. 아직 앞날이 멀고도 먼 누군가에겐 청년이지만 잠시 멈추어 나의 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책도 보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전혀 다른 것에 부딪혀 보고 무너져 보고 우울증도 진단받고 극복해 보고 다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도 약을 끊고 좋아하는 일을 해보고 유능감도 느끼고 내 안의 자존감도 찾아냈다. 그렇다면 불안은 정말 있던 것일까. 불안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본래 근원에 대한 탐구가 많았다. 학교에서 나에게 주입하는 공부는 너무나도 이해가 가지 않고 따르기 싫었다. 간단하게는 극심한 청개구리 타입이었다. 어떻게 김소월의 시를 아무개의 분석으로 답을 내릴 수 있는지 그 근원지가 이해가지 않았으며 수학에서 나오는 수많은 공식은 왜 나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청개구리는 서른셋이 된 나이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책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책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끊임없이 하고 있던 취미였다. 여느 날이었다. 철학과 관련된 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 책에는 인간 깊은 무언가에 대한 부분을 철학과 연관 지어 풀어내어 준다. 자유, 세계관, 절망, 죽음, 자살, 애도, 수치심, 용서, 행복, 의미 그리고 불안. 유독 불안에 관련된 장에서 나는 끊임없이 밑줄을 긋고 메모를 했다. 나도 잘은 모르는 이름들이지만 야스퍼스, 키르케고르, 틸리히, 하이데거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은 말한다. ‘불안은 달리 특정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불안이 그 대상을 제거하여 해소될 수 없다.’, ‘불안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면서 이를 참아내고 견디며 이겨낼 때 오히려 실존(자신)의 본래성을 획득할 수 있다.’(볼나우),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키르케고르). ‘불안을 질병이 아니라 불안을 피하고 거부함으로써 오는 절망이 오히려 질병이다.’


‘불안’의 장을 읽으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잘 이겨내고 살아간 것이 아닐까.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잘 걸어 나간 것이 아닐까. 아니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서른셋. 나는 살아있고 나는 돈을 버는 사회인이고 나는 남편이고 나는 아빠다. 나는 직장에서의 위치는 분명하고 남편으로서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며 아빠로서 아이를 하늘로 던지며 같이 웃고 같이 손을 잡고 최선을 다해 달리며 아이를 웃겨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행복을 느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불안은 한 마리의 용이었던 것이다. 상상의 동물. 용. 그리고 상상은 온전히 나의 것. 나의 머릿속에 있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는 불안을 항상 곁에 두고 묶인 채 살았지만 항상 그것을 풀어내고 꺾어내고 잘라내고 불태우며 지금까지 잘 살아낸 것이다.


잘 살아냈다. 과정이고 뭐고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살아있다는 것이 내가 불안을 잘 물리쳤다는 증거다. 지금은 불안하지 않다. 아니 불안하지 않다는 것은 거짓이겠지만 불안과 정말로 잘 지낸다. 과거 불안이 나의 옆에 있을 땐 벌벌 떨었다. 사실 불안은 그냥 나였는데. 불안이 나를 묶는 것 같았지만 불안은 그냥 있었다. 그것도 나였고. 내가 나였을 뿐인데 내가 벌벌 떨고 묶였다고 움직이지 않았다. 인사이드 아웃 두 번째 편에 메인 주인공은 어쩌면 불안이다. 커가면서 생기는 불안은 잠식하기도 하고 어쩌면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주인공은 해답을 찾는다.


불안과 잘 살아가는 것. 불안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그렇게 잘 걸어가는 것. 나는 잘 걸어 나갔다. 잘 헤쳐나갔고 잘 이겨냈다. 인사이드아웃 라일리의 내면은 결국 모두가 함께 융화되어 살아나간다.


그것이 삶. 삶은 불안. 불안은 삶. 불안은 나. 나는 불안. 그저 나일뿐. 너무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는. 잘 해내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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