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지우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은 명상과도 같다. 조용히 깊은 호수에 작은 돌멩이를 떨어뜨린 것과 같다. 큰 돌이 떨어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땐 대게 글쓰기를 마저 완료하지 못한다. 깊은 호수 그리고 작은 돌멩이. 돌멩이가 호수의 수면과 닿은 뒤로 생겨난 파문은 작은 돌멩이가 빠져든 것을 알 수 없다. 점차 파문은 멀리멀리 닿지 않을 곳까지도 닿게 만든다. 작은 돌멩이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 글은 그런 종류의 명상을 일으킨다. 계속해서 돌을 던지고 계속해서 파문을 만든다. 파문은 마음의 동요일 수도 있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혼란일 수도 있고 돌멩이가 쓰레기로 쌓일 수도 있다.


글 자체의 속성이 그런 것 같다. 글을 읽을 때도 혹은 쓰고 있음에도 그렇게 느끼는 것을 보면. 그래도 읽기와 쓰기의 성질은 다르게 느껴진다. 읽는 것은 종종 돌멩이를 던지는 것과 같다. 돌멩이를 던지지 않을 때도 있다. 보통 돌멩이를 던질 수 있는 책을 선호하지만 그것을 다 읽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는 없다. 그런데 돌멩이를 쥐게 만드는 책을 읽으면 파문을 일으키기 위해 돌멩이를 던지게 된다. 가령 예를 들자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매우 매우 좋아한다. 누구나에게 좋은 작가이고 세계에서 저명한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지만 나에겐 그의 글이 꽤나 큰 파문을 일으킨다. 나름 돌멩이의 크기가 큰 작가인 것이다. 하루키 소설만 보지 않고 국내외 가리지 않고 책을 읽지만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의 끈이 짧아서 책에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책도 만나곤 한다. 그럴 때 다시 나의 마음속 깊은 곳의 파문을 일으키기 위해 하루키의 책을 집어든다. 그리곤 같은 크기의 돌멩이를 호수로 던진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에게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성질이다.


쓰는 것은 어떤가. 쓰는 때의 돌멩이는 읽을 때의 모양과 굉장히 다르다. 쓸 때의 돌멩이는 날카로운 돌, 큰 돌, 모래 같은 돌, 화강암, 대리석, 점토 등 돌멩이 같은 것이면 모두 던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형태만 비슷하면 던질 수 있다가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을 던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던졌다가 건지기도 한다. 이건 아닌 것 같아 하고 수거해서 다시 창고에 넣어둔다. 그래서 읽기의 파문과는 다르게 쓰기의 파문은 형태부터 진폭까지 매우 다양하게 발생한다. 그럼으로써 글쓰기에 오히려 더 자극점이 된다. 나의 내면의 있는 것을 꺼내기 위해서 뉴턴의 운동법칙을 사용하는 것이다. 작용하는 만큼 반작용이 있다. 떨어뜨리는 크기와 모양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다른 것들이 나온다. 쓰기란 나에게 그런 성질이다.


어느 것이 좋냐 마냐도 없다. 글과 관련된 행동은 모두 나에게 어울리게 하고 싶고 또 자세히 보면 어울린다. 결국 내 마음속의 무엇인가를 스스로 건드릴 수 있는 트리거포인트를 알고 있다는 것이 좋은 점이다. 글로써 삶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편이다. 글을 쓰기 전과 후의 달라진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본질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본질은 어긋나지 않았으나 분명 삶의 색채가 뚜렷해졌고 조도 역시 명확해졌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의 경계가 명확해졌다랄까. 애매모호한 것들은 모조리 글로써 풀어내고 정리한다. 그것이 온전히 긍정적이고 혜택적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에겐 한 없이 좋은 아이템과 같다. 글을 읽고 씀으로써 단순히 텍스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글파일에 브런치 서랍에 저장되는 것뿐만 아니라 더 성능이 좋은 뇌가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


글은 기록과 연관된다. 기록은 역사와 연결된다. 글을 씀으로써 기록하고 역사를 남긴다. 조선왕조실록도 기록이다. 기록함으로써 역사가 되었다. 빼어난 것 훌륭한 업적 위대한 일들을 적는 것이 기록할 대상이고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사소한 것 들까지 뺴곡이 기록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종은 활을 쏘다 낙마를 했으나 머쓱했는지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는 기록이 있다. 광해 때엔 UFO 같은 것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 땐 흑인병사를 표현한 기록이 있고 대장금은 실존인물임을 실록이 말해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보지 못한 것을 보아야 하고 듣지 못한 것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와 같게 들린다. 자신의 시야에서 만의 한정된 시야를 가질 것이 아니라 글을 봄으로써 글을 씀으로써 다른 시야 다른 감각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글을 쓰는 것이 그런 위대한 반열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시간이 지나 내가 다시 돌아볼 때 나의 글이 나의 기록이 나의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나를 이루는 뿌리가 되겠지. 글에는 분명 그런 힘이 있으니까. 그것 또한 기록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평생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평생 글을 읽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또 다른 시야가 열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아는 것 외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품어가고 살고 싶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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