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생각들 모음

by 지우

- 커피를 마실 땐 커피 속에만 있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페이드 아웃. 연극에서 누군가 독백을 하는 순간 그에게만 조명을 집중하고 나머지는 암흑으로 물들인 그런 순간. 커피 역시 검다. 유리잔에 담아두고 햇빛이 가득하다면 그 색은 와인과 같지만 머그잔에 넣어두면 음영 때문인지 커피는 검다. 그래서 그런지 커피가 입에 들어오기 전 커피색을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페이드 아웃. 커피의 맛은 내가 품고 있는 나의 가치관과도 동일하여 놓을 수가 없다. 다양함의 세상. 취향의 영역. 정답은 없고 즐기는 것만 있는 음료. 가치판단은 나의 몫이다. 내가 맛있으면 맛있는 커피고 내가 맛이 없으면 아무리 비싸도 맛없는 커피다. 오늘의 커피는 게이샤. 게이샤 커피는 커피원두, 생두의 모든 근간이 되는 품종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평가되는 품종이다. 그러는 만큼 아침에 딸아이를 등원시키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브로잉 했다. 커피의 색은 여전히 검다. 커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침의 고요가 좋다. 커피를 입에 머금고 잔을 내려두면 다시 페이드 인. 세상은 환해지고 세상에 내가 할 일들이 넘친다. 이런 세상이 좋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좋다.


- 어제 아내와 차를 타고 가며 행복한 상상을 했다. 아이가 독립하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내가 먼저 대답했다. 나는 파리에 가서 한 달 살고 싶어. 박물관들에 하염없이 앉아있고 싶어.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가장 좋아하는 모네의 그림은 하루에 한 번씩 보고 싶어. 아내는 세계일주를 가자. 그러곤 별말 없었다. 여기서 우리 부부의 차이를 다시 느꼈다. 나는 계획하고 싶어 한다. 아내는 당장의 일 외엔 계획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상이한 부분에서 부부임을 느낀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은 메꿔주고 훌륭한 부분은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리고 따른다. 내가 생각하는 부부는 잘 맞아야 살 수 있는 것이기보단 오히려 모자라야 같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와의 대화가 결혼 연차가 늘어나면서 더욱 무르익어가는 느낌이 든다.



- 딸은 역할극을 좋아한다. 그리고 딸은 책을 매우 좋아한다. 어제 도서관에 가서 아이를 위한 책을 15권가량 빌려왔다. 그 책들을 아내와 같이 보며 이 부분은 아이가 좋아할 것 같다. 이 책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 책은 아이에게는 조금 쉬울 것 같다. 등등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도중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흰 강아지와 흰 돌고래의 이야기. 나는 그 책을 보고 분명 딸아이가 엄마에게 돌고래를 하고 자신은 멍멍이를 하겠다고 할 것 같다라고 아내에게 얘기했다. 아내는 쿡쿡 웃었다. 대충 예상이 가서 웃은 것인지 나의 생각이 웃긴 것인지. 스토리는 대충 멍멍이가 나비를 쫓다가 바다에 빠졌고 돌고래가 빠진 멍멍이를 구해준다는 내용이다. 내가 집에 있으면 밥은 내 담당이라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아이와 아내는 책 삼매경. 아마 흰 강아지와 흰 돌고래의 책을 읽었나 보다. 등뒤로 들려오는 대화에 피식 웃고 말았다.


"엄마 돌고래 해. 난 멍멍할게."


나와 아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깊은 행복을 느꼈다.



- 글쓰기에 확장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최근 들었다. 약 2년 전. 글쓰기를 처음 시작할 때 딱 하루에 A4용지 1페이지를 가득 채울 정도만 쓰자. 그 목표는 작년까지 꾸준히 했다. 잠시 멈추었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한번 쓰면 A4용지를 빼곡히 채울 수는 있었다. 2025년이 되며 나의 글쓰기에도 확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고 시를 쓰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시간이 나면 앉아서 어찌 되든 저찌되든 들들 볶든 내용이 잘 나오지 않아 머리가 삭아버리는 것 같든 어쨌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쓴다. 많이 앉아있기. 그리고 글쓰기에 집중하기. 쉽지 않은 방식이다. 누구에겐 쉽겠지만 초보 작가지망생에겐 꽤나 어렵다. 그런데 재밌다. 그게 다행이다. 재미있기에 할 만하다. 산문도 쓰고 일기도 쓰고 시도 쓰고. 쓴다는 행위 자체의 행복과 재미를 느끼다 보니 다 쓰고 나서도 '힘들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이런 것 보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행복은 어떨까 상상해 본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지만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면 좋아하는 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살다 죽어도 눈감을 때 후회정도는 하지 않겠지. 그래도 나는 인간이니 나약하니 무섭긴 하겠지?



- 최근 가장 추운 날이 지속된다. 입춘인데 봄에 입구가 맞나 의심된다. 조상들은 분명 이 정도 날씨에서 봄의 향기와 온도를 느낀 것이 맞을까? 체감온도는 영하 15도에 가깝다. 그런데 참 변태 같게도 이런 날에 달리는 것이 좋다. 여름의 한가운데. 겨울의 한가운데. 변태 같은 자신을 나는 좋아하기도 한다. 이런 날에 달리려면 옷을 한가득 입어야 한다. 싱글렛. 반팔. 긴팔. 기모긴팔. 바람막이. 패딩조끼. 레깅스. 러닝바지. 양말. 무릎보호대. 모자. 이 모든 것을 운동이 끝나고 빨래하면 건조대 가득 운동복뿐이다. 달리기 시작하면 폐 속에 영하의 공기가 들어온다. 폐가 씻겨져 나가는 기분도 든다. 이렇게 추운 날엔 미세먼지도 없어 얼어붙은 공기를 가득 마신다. 얼굴은 떨어져 나갈 것 같고 눈이 얼어붙는 느낌도 10분만 달리면 녹아내린다. 그런데 어제는 바람이 너무나 많이 불어 다리까지 부서지는 것처럼 얼어붙었다. 감각이 저리다 못해 무감각까지 가는 듯했다. 다행히도 그쯔음 집에 도착했더니 남은 것은 고양감과 정신의 쾌청함. 영하의 달리기는 그런 매력이 있다. 인고의 시간을 거치면 모든 것이 건강해져 있는. 폭염의 달리기는 좀 다르다. 열대야의 달리기를 하자면 직업이 싸우는 사람들인 파이터들(UFC나 복싱 등)이 감량을 이렇게 하나 싶다. 땀이 나다 나다 더 날 것이 없겠지 하는데도 난다. 옷이 땀을 흡수하다 흡수하다 더 안돼서 옷에서 땀이 떨어진다. 다리와 몸은 습기로 체중이 10kg는 늘어난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런 열대야에 달리냐. 하면 그런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다가온 가을의 달리기는 체중에서 10kg를 뺀 달리기처럼 느껴진다. 변태가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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