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지우

말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말 하나로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나오게 할 수 있다. 구덩이가 깊지 않다. 구덩이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있다. 구덩이엔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너다. 구덩이는 위험하지 않지만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말은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말에 물리적 에너지가 존재한다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함을 내포하고 있다. 말을 단순한 파장의 흐름으로 귀를 통해 인지되는 것이라 하기엔 많은 것들을 움직인다. 그것이 생명이 될지 어깨를 안아줄 힘이 될지 다리를 지탱해 줄 목발이 될지는 말하는 사람이 정하고 듣는 사람이 정한다. 말하는 사람은 그래서 자신의 말이 가진 힘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말을 경시하는 순간 생명은 구할 수 없고 어깨를 안아줄 수도 없고 누군가를 지탱해 줄 수 없는 가벼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화자는 스스로의 말의 무게는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입에 담기는 무게이며 입에 뱉어지는 무게이며 입에 걸리는 모든 느낌에서의 모든 무게를. 듣는 사람은 그에 반해 오히려 가벼워야 한다. 너무 깊이 담아서도 안되고 화자와 동일하게 경시해서도 안된다. 가볍다는 정의는 상대적인 개념보다는 들리는 자체의 직감을 믿으라는 것. 자신이 무겁게 받으면 적정한 가벼움이고 날아갈 것같이 가볍다라면 그대로 들으면 된다.

말은 그렇게 화자에서 청자로 이동하며 각자의 무게대로 해석될 것이다. 그리고 무게는 분명 누군가를 이으킬 힘을 가지고 있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사람의 입에서 가벼이 떨어지는 문장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그것은 누군가의 목을 가를 누군가의 뇌를 쪼개버릴 누군가의 마음을 찢어버린 말이 될 수 있다. 말이 가진 자체적 생명력만큼이나 말로 앗아질 생명력 역시 경시해서는 안된다. 분명 누군가는 농담을 한 것이 누군가에겐 송곳같이 예리하게 파괴해 버릴 것이다. 사람은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이기에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알 수 없기에 안다고 착각하기에 조언한다고 직언한다고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쉽게 뱉어서는 안 된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쉽게 작성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입에 담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무게감을 죽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죽은 사람도 알려줄 수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기에. 아쉽게도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의 무게감을 마치 아는 듯이 다룬다. 단언컨대 '죽음'이라는 말은 인류가 우주가 존재하는 만큼 살았어도 과학이 그만큼이나 발전하더라도 파악할 수도 공감할 수도 인지할 수도 알 수도 없는 분야이다. 단어 하나로만 결부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무게를 가진 것을 누군가의 말 하나로 좌지우지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군대에서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말이다.


사람은 평생토록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누군가를 살릴 테니까. 나는 성선설을 믿는 편이다. 아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누구는 아이를 보아도 성악설이 맞지 않느냐 하지만 나는 그와 반대되는 입장에 서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에서 악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뭍은 악을 거울처럼 보는 것이다. 아이의 맑은 웃음과는 반대로 물건을 일부러 떨어뜨린다고 그것을 악이라고 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이 무엇을 행하여 어떤 반작용이 일어나는지 이면의 작은 면조차 보지 못하는 우매한 자이다. 태초부터 악인은 없다. 태어날떄 아기의 모습에서부터 악마의 탈에 씌워진 아기는 세상에 없다. 모두 그 아이의 악마적 환경을 조성한 어른들의 혹은 그 아이보다 나이 든 누군가의 잘못일 테다. 결국 악인이 없다는 나의 생각은 악인이라도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일 수 있고 자신의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분명 돕는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악인마저 누군가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성선설에 근거한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 품성이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하고 말고 와 마음이 품어지는 것과는 이어질 수 없다. 그것은 행동력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생긴다고 돕는다.라는 가정은 개인적인 생각일 뿐. 돕지 않을 수 있다. 바쁠 수도 있고 귀찮을 수도 있기에. 기본적 품성에서 솟아나는 마음. 누군가를 위한 마음. 그것을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혹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에 대한 이해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아래 기반되어 있는 듯하다.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쉽게 말을 뱉을 수 없다. 이해하려 한다면 오히려 말은 심사숙고 후에 나와야 한다. 말은 누구를 죽일 수 있고 또 누군가를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말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누군가를 도우려 했다면 분명 더욱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이 들어도 쉽게 뱉어서는 안 된다. 칼이 될지 말지는 타자가 정한다. 자신이 언제나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칼의 무게는 타자가 정하니까.


말을 소중히 해야 한다. 이것은 타자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뱉은 말이 자신을 구성하게 된다. 악을 뱉는 다면 아무리 성선설에 근거하여도 악인이 된다. 누군가를 시기질투 한다면 평생토록 그 말만 하고 살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말을 한다면 그만큼 자신의 철조망을 치는 것이다. 말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것이다. 말을 소중히 하는 것을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타자를 존중하는 것이다.


말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 말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소중히 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입에서 나올 말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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