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써 치유받았다.
글을 씀으로써 나는 새 생명을 얻었다. 정말로 구원을 받았다. 기독교 용어이지만 잠시 빌려 쓰겠다. 어릴 적, 글을 써왔던 사람은 아니다. 성인이 되어서 간간이 아이폰 메모장에 이것저것 끄적이긴 했다. 주기적으로 쓴 것은 아니었고 떠도는 생각들을 담아두었을 뿐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머리에 떠다니는 생각이 있으면 붙잡아 메모장에 적어두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습관화된 것은 아니다. 습관을 만들기 위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적고 싶어서 적어두었을 뿐이다. 다시 열어보지도 않는다. 그저 적어두는 것으로 만족하는 행동이었다. 적는 행동들이 별 것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 역할이 있었던 것일까. 작년 여름 불현듯 글이 쓰고 싶어졌다. 단순하게 글 자체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고 글을 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글쓰기.
스스로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글 쓰기엔 목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분명하게도 목적이 없었다. 어떤 것을 위해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지. 에세이? 산문? 소설?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편지를 쓰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다. 일기를 쓰려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을 쓰려하는가. 마땅한 대답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써 내려가는 것만 생각했을 뿐이다. 일단 나의 오래된 삼성노트북을 꺼냈다. 하도 오래 쓰지 않아서 노트북을 구매할 때 받았던 케이스에 뽀얀 먼지가 내려앉아있었다. 어차피 케이스는 쓰는 것 아니니 먼지에 신경 쓰지 않았다. 노트북을 열고 한글프로그램을 켰다. 하얀 백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의 움직임이 어서 쓰라며 재촉하는 듯하다. 자필로 쓰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연필을 쥐는 버릇을 잘 못 들여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자필로는 오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다. 타자속도는 준수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계의 힘을 빌려 '단순하게 쓰는 행위'를 하고자 했다. 그저 써 내려갔다. 형식을 굳이 따지자면 수필에 가까운 글쓰기가 매일 시작되었다.
매일의 글쓰기는 나와 나 사이의 다름을 기록해 나갔다. 나름의 아카이브처럼. 그날에 했던 달리기에 관한 생각. 육아에 관한 스트레스에 관한 생각. 감정에 관한 생각. 행복에 관한 생각. 죽음에 관한 생각. 커피에 관한 생각. 책에 관한 생각. 삶에 관한 생각. 생각이라는 것들을 모조리 기록했다. 생각이 떠오르면 노트북 한글 프로그램의 백지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글을 써 내려갔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로 하며 한 가지 정한 것이 있었다. 한번 쓸 때에 한 페이지는 채우기였다. 항상 지켜낸 룰은 아니지만 간단히 쓰고 싶지 않았다. 글쓰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려 했다. 최대한 풀어서. 최대한 상세하게. 최대한 가득 눌러 담고 싶었다. 시골 할머니집에 가면 사랑이 가득 담긴 고봉밥을 수차례 건네어 받듯이 꾹 눌러 담았다.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느낌. 나의 감각. 모든 것들을.
나의 생각은 쉴 새 없이 굴러간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쉴 새 없이 떠오른다. 게다가 매분매초 지속된다. 생각의 굴레는 나의 약점들을 더 강화시키는 하나의 물레방아이다. 생각의 시간이 지속될수록 모든 생각들은 강화되어 철옹성이 된다. 계속해서 굴러간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나의 생각은 악하고 나쁜 쪽으로 굴러가는 것을 더 선호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을 끊어내지 않으면 나만의 늪으로 끊임없이 걸어 들어간다. 장화도 없이 끈을 나무에 묶어놓지 않아 살길이 없어 보이는 그런 늪. 늪에 한번 빠지고 나면 빠져나오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하지만 너무나도 고되다. 스스로 들어갔지만 스스로 나오는 것이 가장 어렵다. 스스로가 만든 미로인데 그 해답을 알 수가 없는 모양새이다. 계속해서 막다른 길이다. 계속해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그 미로 속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는 동안 미로에 심어진 덩굴들에 몸 이곳저곳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발악적으로 발악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늪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늪은 글을 써 내려갈 때마다 숨을 쉴 수 있도록 걷어내어 진다. 늪이 걷어내어 지는 것인지 없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여하튼 늪에서도 살 수는 있게 만들어준다. 글쓰기는 실로 나에게 그런 존재이다.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글을 써 내려갈 때마다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진 것이다. 새하얀 백지 속 빼곡하게 생각을 새겨놓으면 이내 가볍게 숨을 내어 쉴 수 있게 된다. 백지라는 공간 안에 나의 모든 한숨, 걱정, 근심을 모두 내려놓고 떠난다. 간단하게 컨트롤 + S를 눌러 저장해 두면 그것으로 당시에 있던 잡념들은 삭제되는 것이다. 글을 써온 구력이 몇 개월밖에 안 되는 사람이지만 글쓰기로써 얻었던 것들은 나의 삶을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갈 수 있는 힘이었다.
그로부터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지금도 어떤 형식이든 얽매이지는 않는다. 이제는 자필로도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자필글쓰기는 일기에만 한정되어 작성한다. 조금은 짧게 쓸 수 있는 글은 자필로 쓰려고 한다. 이전에는 편하게 아이폰 메모장에 작성하곤 했지만 이제는 자필이 더 짧은 글에는 효과적이다. 자필로 쓰는 일기의 글의 느낌과 컴퓨터로 작성하는 글에는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일기를 쓰고 있으면 내적친밀감이 올라간다. 조금 더 나를 보완해 주고 내가 더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자필로 쓰다 보면 글을 쓰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져 조금 더 신중한 어구들이 나온다. 그와는 다르게 컴퓨터로 쓰는 글은 속도가 빠르다 보니 많은 것들을 쏟아낼 수 있다. 정말 토해내듯이 나올 때도 있다. 그럴 땐 정말 힘든 날이 대다수이다. 써 내려가는 속도가 빠르기에 많은 것들을 자연스러움 그대로 쏟아내어 개운하다. 그러나 다시 그런 토해낸 글을 쳐다보면 글의 앞뒤와 말의 연결고리가 정말 야생에 가깝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브런치에 관련된 글들은 토해낸 글들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걸친 수정본으로 연재를 하고 있다. 그만큼이나 토해낸 글에는 완화시켜야 될 표현들이 많고 연결고리를 다시 만들어주어야 되는 부분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토해낸 글은 정말 순수하게 나를 위한 행위다. 토를 해낸다는 것은 몸이 그것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어 혹은 몸에 해롭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위장에 있는 것들을 뱉어내는 행위다. 나에게 불필요한 생각과 해로운 잡념들은 토해내야 마땅했다. 그런 행위를 글쓰기에 쏟아내는 것이다. 맑아지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한번 쏟아내는 데에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30분을 소요한다. 주욱 쏟아내는 날에는 정말 실제로 토한 것처럼 전신이 저릿저릿할 때도 있다. 정말로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해롭고 불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토해내는 것.
글쓰기로 나는 삶이 달라졌다. 정말 달라졌다. 일순간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잠시라도 변함을 느낀다. 맑아지고 청아해지고 가벼워진다. 글을 씀으로써 나를 내려놓는다.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현실에서 살 수 있게 된다. 현실에서 살게 되면서 더 나를 가꿀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는 진정 나에겐 구원이다. 어떻게 내가 글을 쓰기로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본의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글을 쓰기로 한 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1978년 4월 어느 쾌청한 날 오후에 나는 진구 구장에 야구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중략...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저. -
하루키가 된 것은 분명 아니지만 나에게도 무엇인가가 왔다고 느끼기는 한다. 하루키처럼 정확한 느낌은 전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그것은 하루키와는 분명히 다른 나만의 것이다. 나는 야구구장에 있지도 않았고 방에 있지도 않았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 역시 '글을 써야겠다.'라는 다짐도 아닌 선언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나의 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받아 언어화시킨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글을 씀으로써 구원을 받고 있다. 삶을 훌륭하게 살아내고 있고 삶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다. 나의 글쓰기는 어디로 도달할지 목표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글을 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하루에 글을 몇 번이고 써도 목표지점은 없다. 그저 내가 써 내려갈 것이 있다면 쓰는 것이다. 나는 분명 글을 씀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나는 글을 평생 써내려 갈 것이다. 나는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