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하나, 지금을 살다.

나는 현실에 있다.

by 지우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투명한 단열 유리를 통과하여 마루로 내리쬐어진다. 눈으로만 보아도 꽤나 뜨거워 보이는 그런 류의 햇빛이다. 살결을 스치고 지나가는 빛의 속도에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마루도 뜨거울까. 괜스레 묻고 싶어 진다. 내려온 햇빛이 아닌 내려오고 있는 햇빛을 바라보면 빛 속 먼지들의 유영이 보인다. 유리잔에 담긴 진한 갈색의 냉커피 한 모금 마신다. 메마른 목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감촉이 커피의 진한 색과 같이 확실한 느껴진다. 실제로 느껴진다는 것을 계속해서 인식하고 있다. 햇빛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경로를 보며. 식도를 지나가는 커피의 온도를 느끼며. 머리와 손으로 현실화되는 나의 글을 바라보며. 현실에서 살아가는 감각을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 애쓴다. 정말 애쓴다 애써라고 스스로에게 해줄 말이다. 현실은 그만큼 쫓기 어렵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현실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이다. 이중적이다. 어쨌든 현실을 알고 지금 당장, 롸잇 나우를 외치며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삶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현실에 있다. 나는 현실에 있다. 나는. 현실에. 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며 떠도는 언어적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어 현실로 나가게 만든다. 나는 현실에 분명하게 있다. 그 소리는 음파의 형태로 현실의 공기를 가로질러 갔을 것이다. 따스하게 유영하는 먼지를 통과하고 커피가 담긴 잔에도 작은 진동을 울려주었다. 벽에 부딪히고 소멸되기도 하고 다시 돌아 나의 귀로 도달하였다. 현실이다.










나는 현실에 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을 시시각각 스스로에게 인지시키지 않으면 곧장 과거에 살게 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다가온 미래에서 살고 있다. 그만큼이나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은 꽤나 복잡한 작업이다. 불안 초조 다급 막막 답답. 나열된 단어의 감각은 현실에 살고 있지 않은 대가다. 다가올 미래가 어떨지 몰라 불안하다.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초조하다. 내가 살아온 과거가 허상 같아 다급해진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막막하다. 모든 것들이 삶을 답답하게 만든다. 현실에 있지 않으면 말이다. 산다는 것은 나에게만큼은 큰 군장을 메고 기나긴 퇴각로에 올라선 패잔병과 같다. 무거운 군장은 아무도 들어줄 수 없고 퇴각로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안식처인 집은 너무나도 멀다. 퇴각의 끝은 어느 지점인지 가늠할 수도 없다. 군장의 무게는 늘면 늘었지 절대적으로 가벼워지지 않는다. 군장 안에 있는 물건들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버려야 하는데 녹록지 않다. 현실에서 산다는 것은 내가 가진 군장의 무게를 어깨에 정확히 얹고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다. 군장은 아마도 과거일 것이다. 과거를 등에 진 채 끊임없이 걸을 뿐인 것이다.


과거라는 시공간 안에는 많은 것들이 왜곡된 채 존재한다. 왜곡되지 않은 실체를 인지하기란 정말 어렵다. 기억은 스스로가 원하는 기억을 제일 표면에 내걸어 저장소에 두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진한 슬픔도 진한 행복도 존재한다. 개별 기억의 깊이에는 분명 다른 스토리도 있을 것이다. 실체를 알 수 있는 깊이까지 들어가는 것을 과거는 쉽사리 허락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왜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과거라는 것을 나의 편으로 만드는 작업도 필요하다. 자존감을 위해. 자신감을 위해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래서 기억이 나지 않는, 정말 가물가물한 기억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실체를 알기 위해 아픈 기억일지언정 들어가 본다. 과거의 숲에서 탐험을 하고 과거라는 대양에 머리를 처박고 잠수한다. 그리곤 내가 그 기억에서 표상하고 싶은 것을 골라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로 갈아치운다. 좋아 보이는 것을 골라 군장에 담고 괜찮아 보이는 것을 채집하여 또 군장에 담는다.


미래는 어떠한가. 미래는 사실 존재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허구적인 존재와도 가깝다. 문학소설과 같은 가상적인 이야기가 더 사실감 넘치게 느낄 때도 있다. 다가올 미래란 허상은 나에게 쉽사리 진실처럼 다가오질 않는다. 미래를 위해 살아갔었다. 집안자체가 미래를 지향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가족들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꽤 이단아였다. 나는 미래 따위는 딱히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가족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려 했기에 미래를 향해 걷는 가족과 같이 걸어 나갔다. 아버지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즐기셨고 형은 첨단산업 역군의 중심으로 달려갔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미래지향이 무슨 소용 있었나 싶다. 도움은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수적인 작업이란 것엔 확신은 없다. 더 단순하게 살아갔더라면 나의 많은 것들이, 행복으로 기억됐을 많은 것들이 삶에 자리 잡아주지 않았을까. 미래라는 머나먼 지향점을 바라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었다. 사실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게 아니고 저절로 시간이 도래하는 것인데 말이다. 지금에 와서 당시의 선택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굉장히 부당한 처사이다.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실적 감각을 들여다보니 그렇더라. 과거는 과거였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단어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님을. 과거는 표상이고 미래는 허상이다. 물론 나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겠지만 말이다. 표상은 나를 만들었고 허상은 꿈을 꾸게 하긴 한다.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짙은 안갯속에 내버려 두는 것일 수 있다.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삶을 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이런 잡념들의 종착점은 현실이었다. 현실. 현실만이 나를 살아가게 하고 현실만이 내가 있어야 할 공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과거로 가려는 나를 붙잡고 '대원, 제자리 원위치!'를 부대 사령관처럼 외쳐댔다. 미래로 달려 나가는 나의 목덜미를 붙잡고 시트에 앉혀 안전벨트를 매어주었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듯하다. 소설 속 세계의 그림자는 주인공의 체體와 분리되어 개별적인 형태로 주인공과 소통한다. 실제 그림자의 주인과는 전혀 다른 인격체와 같이 행동한다. 주인공과는 분명 다른 개체이다. 다른 공간에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개체로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그림자는 결국 주인공에겐 '나'이다. 두 개의 나.


나에겐 세 개의 나이다. 과거 미래 현재. 과거라는 나의 뒤에 있는 그림자. 미래라는 나의 앞에 있는 그림자. 그리고 나. 현실에서 살아내기로 한 다음부터 그림자를 통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살아왔던 것을 거스르는 반역죄 같은 행동이며 중세의 마녀사냥과도 같은 일이다. 죄는 없지만 명목상으로, 표면적인 척결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작업에 대한 대가. 현실의 나를 보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분명히 참이자 진실에 가깝다. 중세의 썩어빠진 가톨릭의 면죄부 같은 것이다. 당시엔 그것이 참이자 진실이었다. 그렇게 믿었을 뿐이다. 당장은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옳고 그름이 아닌. 현실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과거와 미래 역시 현실에서 사라진다. 현실이 기준점이며 현실이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현실의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현실의 나를 다듬기로 결심했다. 나는 현실에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현실에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알고 싶었다. 곧 모든 것들이 현실을 중심으로 해쳐 모였다. 과거라는 그림자. 미래라는 그림자. 그리고 현재의 나.


삼위일체의 '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실의 나- 로 합쳐진 뒤 자신감의 빅뱅이 일어난다. 봄날의 따스함이 지속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가 살아내고 있는 것을 해내고 있기에 그래 보이는 것일까. 커피를 내리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 원하는 곳에 이력서를 넣고 대기 중이다.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해당 업체는 공고기간이 한 달이다. 공고 전부터 업체에 관한 이력서를 작성해 두었기에 재빨리 제출했다. 제출한 지 3주가 되어간다. 기간만큼이나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스쳐간다. 내가 될 수 있을까.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무능하다. 경쟁력이 없다. 나이가 많다. 경력이 없다. 짙은 허무감이 느껴졌고 그곳에 면접이라도 볼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과 현실감이 존재했다. 사실 그것을 생각한다 해서 내가 그 어떤 무엇도 조절할 수 없고 정말 손쓸 수 있는 것이 하나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리마인딩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력서뿐이었고 진심이었고 열심히 가다듬었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현실에서 살자.


지금의 나의 모습을 최대한 담아냈고 설령 닿지 못한다 하더라도 분명히 나의 주관이 아니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나에게 생길 부정적인 상상을 몰아내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내었다. 현실에서 사는 것이다.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어쨌든 계속해서 해내가고 있다.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문득 나의 자존自存에 대하여 생각했다. 나를 안 뽑으면 바보 아닌가라고.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몇 년이고 쫓았고 동시간에 한 가지 일이 아닌 여러 일을 해내며 맹렬히 그리고 열심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간호사였던 것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었고 중요도는 다르지만 귀중한 것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을 했었다는 것. 나를 뽑지 않으면 바보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느냐에 집중된 말이었다. 그것은 현실. 이제는 내가 나를 귀중하고 소중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점차 보기 시작한다. 점점 더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것이 내가 하루에 해내고 있는 일들이 반영되는 것 아닐까. 일기를 써 내려가고 글을 쓰고 글을 연재하기 위해 수없이 수정하고 운동을 꾸준히 하고 또 육아와 집관리를 위해 정말 열심히 힘쓴다. 책도 꾸준히 읽고 생각도 하며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구상도 하고 행동으로도 옮긴다. 그리고 너무 빡빡하게 살지 않기 위해 적당히 휴식도 취한다. 내가 나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는다. 현실의 나를 가꾸고 돌보는 것이다. 이것이 양생이다.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 콘크리트는 단단해지고 있다. 기반이 튼튼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건물이 지어진다 한들 큰 지진과 해일이 와도 버틸 수 있을 것이란 건축주의 자신감. 단단함이 지금 나의 자신감으로 혹은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것 인가. 이런 적이 흔치 않다. 아니 없었다. 내가 나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순간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한 자신감이 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꽤나 생겼다는 것을. 하나둘씩 알아내고 있다. 내가 나에게 어떻게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를. 결국 내가 나를 위한 행동을 계속해서 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현실을 살아내기 때문이라 확언한다.


나에게 소중한 시간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최근에 조금 스스로에게 감탄 같은 것을 한 것이 있었는데 컴퓨터를 끄고 책을 드는 행동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컴퓨터보단 책이 좋다는 것에 확실한 반증이었다. 컴퓨터는 사실 너무 많이 하고 살았기에 그럴 수 있다. 스스로에게 질렸을 수도 있다. 나에게 컴퓨터란 오래된 친구다. 놓을 수 없는 존재였기에 컴퓨터는 언제나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문득 책을 읽고 싶었다. 보통의 흐름과는 달랐다. 아무리 해도 놓을 수 없는 존재를 놓아두고 내가 책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의식적 흐름이 아닌 무의식의 흐름으로. 그리고 그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내가 소유하고 있음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음에.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반복적인 행동을 끊을 수 있음에 감탄했다. 결국 그것 또한 나의 자신감에 나의 자존감에 기여를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햇빛이 내려오는 자리에서 눌러앉아 책을 보고 커피를 먹고 햇빛을 받고 있는 행동이 좋다. 그 안에서 온전히 행동하는 내가 좋은 것이다. 자신감이 가득 차 자만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하루를 꾸준히 잘 살아내고 해내고 있더라도 나는 그렇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내가 나를 보는 모습에 자신감이 묻어나는 말이 샘솟는 것은 정말 기적적인 일이다. 나는 분명 나아지고 있다. 나의 우울증도 이겨내고 있고 나는 더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더 행복하기 위해 더 멋져지기 위해 내가 나를 위해 이렇게 살아내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