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행복을 받아들이다
행복. 참으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주제. 행복 그 자체만을 본다면 너무나도 달콤하다.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순간이 어떤 일이라도 만족할 수 있을 터. 그러나 행복은 그다지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꽤나 씁쓸하다. 손을 들면 닿을 듯 보이는 별과 같다랄까. 별은 저 멀리도 있는데 말이다. 행복을 모두들 쉽게 찾을 수 있었다면 행복에 관련된 글이나 영상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행복은 그만큼이나 굉장히 가까운 듯 없는 듯 느껴지는 존재이다. 개인적으로는 행복은 실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존재하는 것을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존하진 않지만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는 개념이라고 정말 개인적으로 느낀다. 어떻게든 그곳 혹은 당시 행복을 찾아낼 수 있어야 행복이라는 것이 다가오지 책상에 올려져 있어 거머쥘 수 있는 식기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찾는다. 어떻게든 행복을 찾는 방식을 터득해서 행복을 느낀다. 행복사냥꾼이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행복만을 향해 바라보면 문득 허상을 쫓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실존하지 않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인지 행복은 유난히도 달면서도 씁쓸한 느낌이 있다. 그래도 나는 정말 끊임없이 나의 삶 속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다.
요즘엔 책을 읽는 행복에 대해 많이 느끼곤 한다. 성취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을 읽어내고 오른손에 남은 페이지가 없다는 감촉과 마지막 커버를 덮는 순간엔 세상을 가득 가진 듯하다. 그런 행복은 정말로 책을 덮을 때에만 실감되곤 한다. 그리고 그런 행복은 책을 읽고 있을 땐 모른다. 아마 무아지경으로 책을 읽고 있기에 그렇지 않을까. 그 속에 푹 빠져있기에, 그 세상 속에 있기에 행복보단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듯하다. 유독 다른 세상을 살아볼 수 있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을 책으로써 습득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문학으로 에세이로 산문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는 것이다. 세상에선 책처럼 친절하게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친절하게 전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책은 실로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는 순간, 다른 세상을 경험한 순간이 소중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독서를 행복의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때에도 굉장한 행복이 존재한다. 나는 하루에 한 일들을 달력에 적고 지우는 습관이 있다. 그렇다고 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비어있을 때도 있고 별 것 하지 않은 날도 허다하다. 그러나 가끔씩 한주에 한번 정도 빼곡하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온전히 실행하는 날들이 나타나곤 한다. 그런 달력의 칸을 보고 있자면 스스로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행복은 해서는 안될 마약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취하는 것이다. 굉장히 취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조금 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곳이 네덜란드라면 약 -대마에 한정된- 에 조금은 취하는 것이 허락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어쨌든 소위 말하는 '자뻑'인 것이다. 스스로에게 취한다는 것. 많이 느껴보지 못한 그런 종류의 행복도 꽤나 쓸모가 있다. 하루를 온전히 잘 살아낸 행복은 다음에 있을 모든 것에 굉장히 큰 자신감을 부여해 주기 때문에다. 정말 취한 것처럼.
운동도 마찬가지다. 운동에 빠져들어 달리는 감각을 느끼고 나를 통과하는 바람의 촉감을 수용하다 보면 어느샌가 행복감에 절어있다. 러너스하이라는 것이 있다. 다들 말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러너스하이에 대한 경험은 동일하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하늘을 나는 기분.'과 같은 느낌이다. 항상 러너스하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감각은 달릴 때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 달리기에 진심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그저 오늘 세운 목표를 해결해 내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다. 달리는 행위자체를 사랑하면 머리와 몸을 포함한 나의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빨리 달리지 않는 것이다. 빨리 달리면 살아남기 바빠져 그런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다. 자연 속에 내가 뛰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뛰다 보면 어느새 나는 행복에 가득 찬 채 운동을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달리게 중독되었다. 계속해서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가지 나의 행복에 대한 것들을 나열했지만 나는 그런 종류들의 행복을 깨달으려 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우매한 인간이다. 그러기에 두 팔 벌려 두 다리를 활짝 열고 - 두 다리를 활짝 여는 것은 조금 이상해 보일지라도 - 환영하는 셈이다. 그래야 행복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품을 수 있다. 억지로라도 깨닫고 품는 순간 정말 행복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작은 행복들을 수용하고 있자면 삶이 꼭 복잡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런 순간에도 나라는 인간은 걱정과 고민과 근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땐 아무렴 어때하며 그 순간을 즐긴다. 그리고 나에게 확실한 보상을 해준다. 내가 행복을 느꼈다면 그것을 충분히 헤아릴 시간을 주는 것이다. 요즘엔 그런 보상으로는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있거나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도 한다. 그것 또한 소소한 행복이기에.
행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한결 머리가 가벼워졌다. 머리가 가벼워지니 행복에 대한 감각통로가 더 넓어진 듯 느껴진다. 그만큼이나 또 다른 행복을 찾기에도 쉬워지는 선순환 구조이다.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을 더욱 추구한다. 그렇다고 그러지 못하며 살았던 것을 뒤돌아 보는 것은 아니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역시나 그럴 땐 아무렴 어때. 내가 선택한 것인데 하고 툭툭 털어버리고 다시 한번 두 팔 두 다리를 벌려 행복을 붙잡을 준비를 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