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홈 목사님 사모님과의 소중한 인연
“누나 숙제 도와줄 수 있어?”
얼마 전, 그룹홈에 놀러 갔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시간을 내진 못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두 번은 꼭 그룹홈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옵니다.
집에 가니 같이 지냈던 동생들이 ‘언니!!’ 하며 반갑게 인사해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왔다며 사모님과 교회 집사님께서 삼겹살을 구워주셨습니다. 다 함께 밥을 먹고 있으니 도시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것과는 또 다른 여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창밖의 자연경관을 보며 힐링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그룹홈에 입소했을 때, 너무 어려서 제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아들내미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 모르는 영어 문법 문제를 물어보았습니다. 제빵을 전공한 동생은 마들렌을 구워주기도 했습니다. 훌쩍 커버린 동생들을 보며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구나 체감했습니다.
그룹홈 목사님, 사모님께서 십여 년 전쯤, 처음 귀농을 결심하셨을 땐 월세방에서 시작하셨고 아무것도 갖춰진 것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마을 만들기 간사로 일하시면서 마을에 정착하시고 아동보육시설 그룹홈 운영을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은 고추농사를 지으셨는데 농사일에도, 그룹홈 운영에도, 목회에도 참 열심이셨습니다.
마을 어르신들께서도 진심으로 마을의 발전을 돕고자 하는 목사님의 진심을 알아주셨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 이장 일을 하게 되셨고 마을회관에서 한글 교실, 산수 교실, 건강 체조, 한지 공예 같은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해 오셨습니다. 요즘엔 회관에서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식사를 준비하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그룹홈 옆에 양로원도 짓고, 교회도 짓고, 그 옆에 개복숭아 가공공장도 생겼습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하나하나씩 공간을 늘려나가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룹홈을 퇴소하게 되는 아이들도 점점 생겼지만 목사님, 사모님은 퇴소하고도 자립이 어려운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계십니다. 작년에는 퇴소했지만 장애가 있어 자립이 어려운 아이를 위해 이동식 주택도 마련해 주셨습니다.
처음 귀농하셨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많이 풍족해졌음에도, 목사님은 더 열심히 살아서 아이들이 혹여나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시받지 않고 건강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아이들의 자립을 위해 빵 카페가 있는 작은 도서관을 열고 문화복지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아이들, 어르신들이 운동할 수 있는 실내 수영장을 지을 계획을 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아이들 시설도, 양로원도 인건비를 아끼려 직접 지으셨다고는 했지만 비용이며 땅이며 고려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닌데 말입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는 결심만으로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목사님과 얘기하면서 어렴풋이 답을 찾은 것도 같았습니다.
”꿈이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가게 되더라.“
“그래도 어쩌겠냐, 할 수 있는데 까지는 도와야지.”
목사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는 게 목사님의 소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들 자립,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목사님은 본인이 마음 가는 일을 하고 계신 거구나’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은 고민이 있거나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좋은 어른이 되어주셨습니다. 제가 취업을 못해서 무기력할 때에도 ‘참 열심히 살았는데’ 하시며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고 취업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땐 누구보다 기뻐해주셨습니다.
최근에는 진로고민이 있어 함께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뭔가를 잘 해내고 싶은 욕심에 비해 실행력과 지속력이 부족한 측면이 있어서 목사님께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습니다.
“나는 한 번도 조건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뭔가 시작해 본 적이 없어.“
“완벽한 상태에서 하려고 하면 너무 늦어.”
“뭔가 하나 시작하면 크든 작든 마무리를 해야 해.“
“하고 싶은 것들을 잘게 쪼개서 부담 없는 것부터 하면서 늘려나가는 거야.”
“즐기는 자는 간절한 자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
”나중에 수확하려면 여름에 힘들어도 일을 해야 해.“
저를 잘 이해해 주고, 제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이 든든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항상 제게 강조하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귀찮다고 밥 굶지 말아라 나중에 병난다.”
밥은 굶지 말라는 목사님의 따뜻한 잔소리까지 듣고 나니 다시 도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게 뭐겠어 그냥 이런 게 가족인 거야.
같이 살고 밥도 같이 먹고.“
시설에 들어갔다 퇴소한 경우에 시설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경우는 운이 좋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의지할 수 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제 인생의 큰 복입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제게 해주신 격려와 보여주신 믿음들은 홀로 지방에서 상경해 외로웠던 대학생활을 잘 버티게 해 준 큰 원동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