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빨개져서 대들지 마.
글쓴이 주: 죽기 살기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먹고살기 힘든 5, 60대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던지는 삶과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입니다. 쌀장사로 20년을 살아온 제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풀어보고 있습니다.
자영업자들의 입장은 복장하다. 우리는 물건을 파는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는 물건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복잡한 거래관계에서 최고의 목표는 당연히 고객만족이다.
그래서 어떤 기업은 100% 고객만족을 방침으로 내세우면서 제품이 불만족스럽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전액 환불하겠다고 공약하는 기업도 있다. 이 방법은 언뜻 보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다.
브라이언 조이너 박사가 소개하는 고객 응대 사례를 보자
제품에 불만이 있는 고객이 환불을 요구하기 위해 고객센터에 항의 전화를 한 사례다. 성난 고객은 환불에 대한 이유를 완벽하게 준비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상담요원이 시원스레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담자의 시원한 사과에 당황한 고객은 오히려 왜 그러한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전액 환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짓는 고객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고객과 적이 되기보다 파트너가 된 것이다.
제일 피해야 할 것은 고객에게 환불해 주기는 했으나 상품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도 하지 않고, 개선하거나 예방책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을 때 고객들을 더욱 화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비스에 문제를 느낀 사람 가운데 불만을 제기해서 만족스럽게 해결되면 다시 그 제품을 구매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70%나 된다는 것이다. (참고☞브라이언 조이너의 사장님 당신이 문제였어 136쪽)
나 역시 한낱 장사꾼일 뿐 영농정책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수십 년 농사를 지어온 사람이 아니다. 식당 사장님들이 쌀 품질에 대해 클레임을 제기해 오면 우선 불편하시면 교환을 먼저 권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장님들이 한 번 더 신경 써서 밥을 해보겠노라고 하신다. 다 같은 소규모 자영업자의 사정을 이해하시는 것이다. 고객에게 제품은 가치만족을 위한 복합체이다. 제품 그 자체가 제품의 본질은 아니다.
손님들은 무조건 싼 가격이나 완벽한 품질을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손님이 클레임을 제기했을 때 쌀집 사장의 응대하는 모습이나 사후관리에 임하는 예의 바른 자세를 원하는 것일 때가 많다.
우리 가게에는 ‘단군의 맛’이라는 국내산 김치 브랜드가 있다. 상표 이름 ‘단군의 맛’은 내 이름으로 특허청에 상표 등록되어 있다. 그런데 판매자가 아무리 우리 김치는 아삭한 맛이 일품이고 특허청에 상표등록까지 되어있다고 말해 본들 손님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김치 장사 역시 쌀장사처럼 애로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식당에서 원하는 숙성도가 너무 다양해서 곤란할 때가 많다. 어떤 사장님은 무조건 갓 담은 김치를 달라고 한다. 반면에 좀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 사장님도 계신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이것은 손님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순전히 사장님 자신의 기호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무조건 갓 담은 김치를 원하는 사장님들한테는 내가 미리 알아서 되도록 최근에 입고된 김치를 갖다 드린다. 그런데도 익었다고 항의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신선한 김치를 드리기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사장님들이 보기에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알아주겠는가? 그래서 특별히 그런 사장님들께는 김치 박스에다 따로 사장님들의 상호를 인쇄해서 스티커를 붙여서 간다. 특별히 신경 쓰고 있음을 알려드리는 것이다. 쬐끔이라도 알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장님들은 사장님 상호가 찍힌 스티커를 보고서야 성에 안차지만 조금은 만족해주신다.
장사 초기에 동래구 안락동에 단과 의원 치고는 꽤 유명한 정형외과 병원이 있었다. 정형외과 하나뿐인 의원급 병원인데도 입원 환자가 많았고 입원환자를 위한 급식팀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 쌀을 납품하게 되었다.
원장님의 부인되시는 분이 급식팀 주방에 가끔 들리셨다. 상당한 미인이시라 눈길이 절로 갔다. 하지만 말투가 똑똑 부러지는 것이 저절로 경계심이 생겼다.
- ‘음.. 조심해야겠군. 흠을 잡히지 말아야지.’
쌀을 옮기고 있는 나를 보더니 아주 예의 바른 자세로 부탁했다. 앞으로 쌀을 들일 때마다 쌀 한 포에 검정쌀을 1되씩 달라는 것이었다.
- 윽, 뒷골!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이가 없는 요구였다. 쌀 한포에 2,3천 원씩 이문이 생기는데, 1되에 7,8천 원씩 하는 검정쌀을 어떻게 끼워 주나?
나는 특유의 논리적인 자세로 최상의 예의를 갖춰서 설명했다. 나 역시 똑 부러지는 말투라면 둘째가라도 서럽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 쌀 한 포에 원가가 얼마이고, 쌀 한 포를 팔면 이문이 얼마나 남고,
- 여기다 검정쌀 한 되를 덤으로 주고 나면 나는 얼마를 밑지고..
- 검정쌀을 드리고 싶어도 못 드리는 저의 입장을 이해해 주셔야 하고..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
미모의 사모님 얼굴이 홍당무처럼 되었다. 이후 정형외과에서 주문이 끊어졌다.
그 이후 조그마하게 있던 그 정형외과는 명의로 소문이 나서 안락로터리 부근에다 입원실이 몇 백 개가 넘고 어쩌고 하는 아주 어마어마하게 높은 빌딩을 지어서 정형외과 전문병원으로 새로 탄생했다. 음.. 이런!
고객을 논리로 이기려고 하는 자세는 장사꾼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깊이 설명하는 것은 하수의 방법이다. 논리로 이기고 나면 나의 쾌감은 올라가겠지만 상대방의 기분은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을 것이다. 말로는 이겼지만 마음으로는 지는 것이다. 장사로 치면 결국 좋은 거래처만 하나 사라지는 셈이다.
이런 이야기를 아는 형님께 했다.
- 그냥 알아보겠다고 하면 되지 무얼 그렇게 진지하게 설명까지 했더노?
- 음.. 그렇군. 허허실실 작전이군.
아주 혹독한 시련을 겪은 나의 응대법은 능글능글한 고수(?)로 거듭나게 되었다. 나는 일취월장했다.
재송동에 새로 개업한 식당이 있었다. 주차장이 딸린 제법 규모가 큰 2층짜리 고깃집이었다. 새로 건축된 건물에 신장개업을 했으니 소위 개업 빨로 두 세 달은 엄청 바빴다. 당연히 사장님의 어깨도 으쓱 올라갔다.
우연히 사장님을 홀에서 만났다.
- 어이, 쌀 사장.
사장님의 목소리가 한껏 부풀었다.
-요즘 마트에 가보니까 여러 가지 잡곡이 섞인 영양쌀이 많이 나와 있던데 사장 집에도 그런 거 있나?
대충 장사에 이력이 붙은 나는 ‘통밥’이 굴려진다.
- 예, 있습니다.
- 다음에 올 때 좀 가져와 보지? 맛 좀 보게.
나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 예, 의논해 보겠습니다.
일주일 뒤에 또 사장님을 만났다.
- 사장, 거 잡곡 어떻게 됐노?
- 예, 알아보겠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시원시원하다.
보름 뒤에 또 사장님은
- 사장. 잡곡 좀 안 가져오나? 맛 좀 볼라다가 숨 넘어 가것다.
- 예, 연구해 보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해맑다.
이렇게 몇 번 하고 나면 사장님은 더 이상 안 물어보신다. 무리한 부탁이란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신 것이다. 꼭 뭘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반응을 보는 것이다. 고객의 다소 무리한 요구에도 시원하게 반응하자. 얼굴이 벌게져서 논리로 치받는 것보다 허허실실 작전이 최고다.
고객의 마음을 다치게 하면 어떤 것으로도 돌려놓을 수가 없다.
제2장. 장사는 힘들어.
장사 시작! 행복 끝, 불행 시작.
환경에 적응하라, 단군의 맛.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겸손은 어려워.
너는 사장님인데 나는 왜 아저씨야.
인생은 허허실실이야!
직원을 잘 모셔야!
먼저 인간이 돼라.
소통은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