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와 우정 사이
글쓴이 주: 죽기 살기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먹고살기 힘든 5, 60대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던지는 삶과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입니다. 쌀장사로 20년을 살아온 제 경험과 느낌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풀어보고 있습니다.
동래구 구포국수집 대표님의 전화를 받았다. 지인 중 한 분의 부탁으로 쌀 구매처를 옮겨야 한다는 취지였다.
잠시 서운했다. 7,8년 넘게 쌀을 납품해 오던 거래처가 아닌가.
병가(兵家)에 이기고 지는 일이 항상 있는 일이듯이 장사꾼에게도 거래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고 하는 일은 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문을 위해 일하는 장사꾼이라 하나 7년여 세월 동안 맺어왔던 관계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는가. 가격 때문인지 품질 때문인지가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우리처럼 식당에 재료를 납품하는 사람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문 다음날 반드시 쌀을 배송한다. 비에 맞아서 내 옷이 젖는 것은 괜찮지만 쌀포대가 비에 젖으면 안 된다. 비옷을 둘러쓰고 쌀포대가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감싸고 쌀을 날랐다. 그렇게 고생한 나 자신의 고군분투가 잠시 처량해질 때가 솔직히 있다.
거래를 끊을 때는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 제일 솔직한 마음이다. 그동안 실무자들로부터 쌀 품질에 대한 아무런 클레임이 없었던 경우는 가격 부분이 제일 큰 요인일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쌀 가격이 꾸준히 내리고 있을 때는 앞으로 더 내려갈 것을 예측한 쌀 도매상들이 아예 손해를 감수하고 미리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수도 있다. 그러면 구매자 입장에서는 어? 그동안 내가 쌀을 비싸게 사 왔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할 것이다. 또는 그동안 바가지를 써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식당 사장님들은 그 이유를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동안 내 경험이다. 구포국수 사장님처럼 전화라도 한 통 해주시는 분들은 그래도 경우가 있으신 분이다. 보통은 쓰다 달다 말이 없이 어느 날부터 연락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구포국수 사장님께는 그동안 감사했다고 선선히 말씀드렸다. 거래의 칼자루는 전적으로 거래처 대표가 쥐고 있으므로 숙명이라 받아들이고 더 친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업에 임하고자 다짐할 뿐이다.
잊을 수 없는 오래된 거래처로 또랑 돼지국밥이 있다. 부산 동래구 안락로터리 서원시장 근처에 있었다. 가게 앞에 또랑이 있다고 해서 또랑 돼지국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가 2001년에 쌀집을 갓 열고 난 직후부터 2020년 사장님이 식당을 은퇴하실 때까지 쌀은 행복한쌀창고만을 이용해 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또랑 돼지국밥은 점심시간이 따로 없었다. 국밥집은 아침 일찍부터 늘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일반 식당에서 상상할 수 없는 양의 쌀이 소비되었다.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쌀집을 연 지 오륙 년이 흘렀는데도 내가 취급하던 쌀의 품질이 고르지가 못했다. 도매상에서 공급해 주는 대로 쌀을 받다 보니 쌀이 생산된 정미소도, 브랜드 이름도 계속 바뀌었다. 우리 가게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없으니 신뢰가 쌓일 수 없었다.
어느 날 또랑 돼지국밥 사장님이 나를 사장님이 살고 계신 아파트로 불렀다. 사장님은 두 그릇의 밥을 내놓았다. 하나는 우리 가게 쌀로 한 밥이고, 하나는 국밥집 옆 재래시장에서 가져온 쌀로 밥을 했다는 거였다.
밥맛을 보았다.
-음, 확실히 좋군!
다른 쌀집 쌀로 한 밥이 말이다.
탱글 하면서 쫀득하게 씹히는 조직감, 구수한 향기, 혀끝에 감도는 단맛이 우리 가게 쌀보다 월등히 나았다.
- 하 군아. 니한테 쌀을 대주는 사람이 형님 뻘 되는 사람이라 캤더나?
사업은 니가 하는 거지, 형님이 하는 기 아이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마음이 아팠다.
대로변에 있는 또랑 돼지국밥은 인근에서 소문난 맛집이었다. 주변 쌀집들에서 눈독을 들이는 곳이다. 누구든 저가 할인 경쟁으로 쌀을 넣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사장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보다 훨씬 싼 가격에 좋은 쌀을 받을 수 있었다. 사장님은 나를 특별히 배려했던 것이다.
또랑 돼지국밥 사장님의 냉정한 조언은 산지 정미소를 찾아다닌 계기가 되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신규 거래처의 경우 첫 방문을 해보면 왠지 모르게 거래가 오래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첫 만남인데 지나친 호감을 보이는 경우다. 우리 집 쌀이 그동안 거래해 온 쌀집에 비해서 가격도 싸고 품질도 좋더라는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비싸게 쌀을 써왔다고 전에 이용하던 쌀집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이런 분들은 조금 싼 가격의 안내지를 보면 바로 다른 거래처로 옮긴다.
참으로 많은 식당 사장님들이 거래처라는 이름으로 거쳐 갔다. 전산에 남아 있는 거래처 정보가 사, 오천은 넘는다. 모두 지난날의 죽은 정보일 뿐이다.
장사를 하다 보면 마음을 표현할 친구를 만들기가 참 어렵다. 식당 주인은 아무리 오래 관계를 맺어 왔더라도 어디까지나 거래처 사장일 뿐이다.
막국수 사장님의 전화를 받고 장사꾼으로서의 사귐에서 그 한계가 어디인지 다시 궁금해진다.
유명 인사들이 쓴 자기 계발 서적들을 보면 거래가 계속되는 동안 인간적인 우정이 쌓여 형제보다 더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본다. 더욱이 그 거래처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거래처를 소개해주어 크게 성공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에게 무슨 큰 인간적인 결함이라도 있는가 싶어 큰 상실감마저 들 때도 있다.
장사꾼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니 특별한 우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아주 뜬금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거래는 거래일뿐 우정이 아니다. 거래와 우정 사이, 장사꾼의 고민이다.
제2장. 장사는 힘들어.
장사 시작! 행복 끝, 불행 시작.
환경에 적응하라, 단군의 맛.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겸손은 어려워.
너는 사장님인데 나는 왜 아저씨야.
인생은 허허실실이야!
직원을 잘 모셔야!
먼저 인간이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