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윤의 회상
1톤 트럭으로 된 낡은 자동차는 오늘도 신이 났다. 운전석 지붕 위에 오늘날 야채 장수들이나 과일 장수들이 사용하는 확성기를 달았는데, 요즘 것보다는 세련되지 못해서 나무 곽으로 둘러싸고 철사로 친친 동이고 얽어서 겨우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 옳다.
우리 마을은 마을 입구 신작로를 따라 길게 나있는 대나무밭을 지나 왼쪽으로 산모퉁이를 따라 돌면 약간 비탈진 아래쪽으로 큰 포구나무부터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아이 적에 농번기 들일을 하느라 저녁을 꼬박 새우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리어카 뒤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럴 적마다 나는 이 대나무 숲속에서 무엇이 불현듯 불쑥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또 내가 아주 대나무 귀신한테 잡혀가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이 대나무밭이 아주 싫었다.
이 느낌은 중년이 되려 하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트럭은 늘 두려움의 대상인 이 대나무밭을 들어서기 전부터 아주 커다란 노래로 구성졌다.
트럭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언제나 김연자의 트로트 메들리였다. 김연자 씨는 69년생인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로 한창 인기가 좋았던가 보다.
무너진 사랑탑,
단골손님,
바다가 육지라면,
임이라 부르리까.
하는 등의 오래된 노래를 빠른 템포로 편곡하여 이어붙인 것들이었는데, 50여 곡이 넘는 노래가 쭈욱 계속되는 테이프였다.
트럭은 늘 김연자였다.
우리 마을 아제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트럭보다 먼저 도착한 김연자의 노랫소리만 듣고도 단박에 읍내 양조장에서 막걸리 배달차가 왔음을 알았다. 트럭은 동네 입구 포구나무 밑에서 퍼질러 앉아 김연자를 아주 구성지게 한참을 뽑았다.
그러면 우리 동기들은 저마다 주전자를 들고 트럭 밑으로 모였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큰 대야를 들고 오는 치도 있었다.
트럭 아저씨는 우리가 내미는 주전자에 막걸리를 한 바가지씩 부어주고 돈을 받았는데 혹 가격을 치러지 않아도 그가 누구 집 아들인지 묻지 않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다음 장날에 양조장에 들러 아무 날 아무 동네에 외상값이라 하면 되었다.
그래도 신기하게 막걸리 값이 덜 치러졌노라 시비하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아이아버지 되는 아제가 잊지 아니하고 값을 치렀을 터이고, 혹 빠트렸을지라도 양조장 주인 되는 이가 술 한 잔 받아주었노라 여겼을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하여간 우리는 그것까지는 몰라도 되었다.
트럭에서 집에까지 가는 골목은 참 기분이 좋았다.
우리 동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조금씩 막걸리 맛보기를 즐겼는데, 어린 것들이 취하도록 마실 리는 없어 막걸리 양이 많게 줄지는 않았겠으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주전자 꼭지에 대고 조금씩 빨아먹는다는 것을 알고는 계셨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과 각자 어릴 때 일을 얘기할 때 그네들도 그러했노라 하면서 좋아라 하는 걸 보면 그 시절 시골 아이들은 누구나 그런 추억이 있었는가 보다 생각이 든다.
우리 동네 집들이 대충 막걸리를 다 받았다 싶으면 트럭 아저씨는 한 1킬로미터 떨어진 윗동네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때는 아주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러면 우리 동기들은 트럭 꽁무니에 붙어 윗동네까지 졸졸 따라가곤 했다.
그러면서 자연 우리는 차에서 들려오는 김연자를 따라 목청껏 불러서 나중에는 김연자 노래는 모두 줄줄 꿰게 되었다.
나중에 중학에를 가서 2학년 수학여행 때, 버스 안에서 예쁜 관광 안내양 누나가 나에게 노래를 하라 하므로 김상진의 '고향 아줌마'를 불렀더니 어린 것이 트로트를 부른다고 아주 깔깔거리고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지금도 고향 입구 대나무밭을 지날 때면 메들리 김연자의 노랫소리가 대나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솔솔 들려온다.
2007년 7월 12일 목요일 오래된나무 하재윤 배상
2022년 12월 다시 보다.
브런치 by 하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