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스무살 청춘시절에 고향 근처 여항산 수발사(修鉢寺)에서 뵈었던 광덕스님을 회상하며 쓴 글입니다.
광덕스님
부제- 하재윤의 회상
광덕(光德)스님의 불경소리는 크고 우렁찼다. 스님의 경 읽는 소리는 경건하다기 보다는 즐겁기만 했다. 오랜 수행기간 동안 다듬어져 절제된 호흡에서 나오는 나지막한 그런 불경 소리와는 아주 많이 달랐다.
스님의 불경 소리는 '어야디야 어야디야' 하는 뱃노래 같은 민요를 목청 좋은 성악가들이 합창으로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대웅전이 아주 쩌렁쩌렁 울렸다. 스님의 목탁소리 또한 아주 신이 났는데 아예 젓가락 장단을 맞추는 소리 같이 '둥다라둥다라 둥다라둥다라' 할 때도 있었다.
스님은 아주 어려운 불경을 새로 익혀서 발표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학생들은 모두 대웅전으로 올라가 불단 앞에 합장하고 서서 스님의 발표를 같이 지켜보곤 했다. 우렁찬 목소리에 목탁이 장단을 맞추는 광덕스님의 즐거운 예불은 무아지경이었다. 광덕스님이 무아지경으로 예불을 할 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여서 내심 미안할 적이 많았다.
나는 학교 적 스무 한두 살부터 대여섯 시절의 방학을 늘 고향 마을 근처 수발사(修鉢寺)에서 보냈다.
내가 광덕 스님을 처음 뵈었을 적에 광덕스님은 정식으로 스님이 되신지 몇 해 되지 아니하였던 모양이었다. 늦깎이로 불제자가 된 셈인데, 그때 마흔 중반쯤이었으니 지금 세수로는 어림잡아 한 팔순을 바라보실 수도 있겠다.
광덕스님은 당신에게 스승이 되시는 수발사 주지스님에게 매우 깍듯하였다. 정식 스님이 되기 전 수행 시절에는 새벽에 주지스님이 쓰실 소세 물과 발 씻을 물을 따로 준비하여 스승에 대한 예우를 다하였다 한다.
내가 절에 있던 시절에도 광덕스님은 가끔씩 주지스님에게 혼이 나곤했는데, 그럴 때면 광덕스님은 얼굴이 벌개져서는 아주 안절부절 못했다.
종루에 사람 키만한 큰 범종이 있었다. 종은 내가 제일 잘 쳤다.
종을 칠 때는 종의 마지막 울림이 끝나고 종이 숨을 한 번 고르기를 기다려야 한다.그네처럼 매달려서 왔다갔다하는 긴 통나무도 종의 울음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종의 숨결이 잦아든다.때를 맞춰 사람도 숨을 한 번 고른 뒤에야 다시 힘껏 종을 친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종이 울음을 채 끝내기도 전에 퉁~하고 쳐버리기 일쑤여서 지나간 울음과 새로 난 울음이 뒤섞여 쇳소리가 났다.
그러면 종소리는 저 아래 마을에 까지 닿지 못하고 절간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하군이 제일 낫다..
스님은 헛허 웃었다. 스님의 웃음소리는 아주 여유롭고 스님스러웠다.
내가 마지막으로 스님을 뵌 것은 결혼을 하고 서른이 채 안 돼서 였는데 시원한 입을 크게 벌리고는
-아이고! 하군이 왔네!!
하고 아주 반겨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내가 학생으로 있을 적에도 스님은 신도들이 저 산아래에서 올라오면 입을 시원하게 벌리고
-아이고 보살님..
-아이고 처사님.. 이 더운데..
하고는 아주 반겨했다.
스님은 조자룡 형의 안부를 물었다. 조자룡은 수발사에서 나와 같이 놀기 좋아했던 조홍래 형의 별명으로 나중에야 알았는데 창원시 현대증권의 지점장으로 있다가 정년을 맞아 퇴임했다. 나 역시 몇해가 지나도록 잊고 있다가 전화로만 껄껄거리며 안부를 묻는 처지라 스무살 후반 형의 얼굴만 기억날 뿐이다.
마지막으로 스님을 만난 지 두 해 쯤 지난 겨울에 다시 수발사에 들렀다. 스님은 다른 절로 가시고 계시지 않았다. 묶인 곳 없이 수행하는 불제자라 특별히 연락처를 남기지 않으니 달리 연락할 방법이 없다 했다. 공양주일을 보는 아랫마을 보살님이 합장했다.
팍팍한 중년이 된 지금 철없이 뛰놀던 수발사 시절의 광덕스님과 그의 목탁소리가 아주 가끔씩 생각난다.
광덕스님은 더 훌륭한 수행을 닦아 큰 스님이 되셨는지 아니면 다시 속세로 돌아오셨는지 알 길 없으나 어디에 계시든 사람들에게 둥다라 둥다라 하는 목탁으로 큰 복을 나눠주고 계실 것은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