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 이성과 감정의 수호자들

by 피디아

자, 앞에서 우리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에 대해서 각각의 철학자들이 각자 내놓은 대답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존재'는 너무 막연하고 너무 거대하고 너무 먼 이야기인 것 같다. 우리에게는 '존재'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더 와닿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한, 그러니까 '윤리'를 논한 두 철학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윤리'를 어디에 세워야할까? 감정? 이성? 여기에 그에 대답한 두 철학자가 있다. 바로 데이비드 흄과 임마누엘 칸트이다.


【제1부 - 제4장. 가벼운 철학 산책: 윤리학】

스물 세 번째 글: 윤리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 이성과 감정의 수호자들


앞의 몇몇 글에서 은근히 드러났을 수 있지만, 나는 현직 교사이다. 고백하건대, 내가 가장 머리가 아픈 순간은 수업을 하거나 업무를 처리할 때가 아니다. 아이들이 '그래서 제가 그걸 왜 해야 하는데요?'라고 되물을 때이다. '그게 좋으니까 해야지!' '그게 옳으니까 해야지!' 이런 식의 말은 그런 친구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 얼토당토 않는 발언을 들을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얼토당토 않아보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어마어마한 대철학자의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 아이들은 알고는 있을까? 그 철학자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의 변호인은 바로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다.


1. 윤리는 감정에 세워야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논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흄의 단두대(Hume's guillotine)'라는 단어를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흄의 단두대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를 영국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지적한 것에서 유래됐다. 그 오류는 바로 '사실판단(is: ~이다.)에서 당위판단(ought: ~해야 한다.)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고양이에게는 생명이 있다(is)”라는 진술은 “고양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ought)”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음'이 '죽여서는 안됨'의 근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결론은 “생명은 소중하다”는 가치판단을 전제로 해야만 나온다. 그리고 그 가치판단 역시 사실판단으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는 주관적인 믿음이나 선언에 가깝다. 결국 당위는, 사실관계와는 다른 별도의 무언가(그러니까, 가치판단을 의미한다)로부터 부여되어야한다. 그러니까, 복도에 쓰레기가 떨어져있더라도, 그게 굳이 학생이 쓰레기를 주워야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덧붙여, 귀여운 고양이를 대하는 흄의 태도를 보건대, 그의 MBTI를 추측하자면 확신의 T 유형이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선언은, 이후 윤리학과 형이상학 사이를 가르는 깊은 협곡을 만들어버렸다. 흄 이전의 철학자들은 저마다의 형이상학적 기반을 사실로 가정하고, 그 위에 윤리를 세웠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의 의지와 계시’,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법’,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의 이데아’나 ‘인간의 목적’을 내세웠다. 흄 이전 윤리학의 질문은 단순했다. 그 형이상학적 기반과 선언하는 가치가 얼마나 그럴듯한가(사실같은가)? 그러나 흄은 단언했다. "사실에서는 어떤 당위도 나오지 않는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선한 신의 존재'를 '사실'로 가정했다. 이는 흄의 단두대 앞에서 잘려나갔다. '선한' 신은 사실이 아니고 가치이니까. 스토아 철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연법'에 '선함'이라는 가치가 이미 내재되어있으니까. 심지어 철저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사회계약론' 역시, 그 '계약'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사실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약'은 살아남았지만, '가치'는 썰려나갔다. 흄 이전의 윤리학들은 흄의 단두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게, 흄 이후의 철학자들이 윤리를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제1과제가 생겼다. 형이상학적 선언, 과학적 실재, 이론, 사실, 원리 등은 그 어떤 것도 당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당위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에 대한 '가치에 대한 판단'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가치'를 무엇으로 부여할 것인가?


다행히 흄은 무자비하게 다리를 끊어놓고 방치한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사실에서 직접 당위를 연결시키는 다리는 끊어놓았지만, 대신 당위의 토대를 마련할 새로운 도구를 제시했다. 바로 정념(passion)이다. 흄이 말한 정념은 현대어로 치면 ‘감정’에 가깝다. 흄의 요지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 전에, 이미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을 보는 순간 '나쁘다' 라고 느낀 판단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그 순간 감각적으로 느껴진 불쾌감에 근거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성적이라고 믿지만, 그 판단은 이성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감정의 산물이다. 따라서 윤리적 판단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만들려면, 감정이 가치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감정에만 기반해서 도덕을 수행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이것은 도덕적 행위라기 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야생적 행동에 가깝다. 여기서 흄이 추가로 제시한 개념이 '공감(sympathy)'이다. '인간은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반응하는 공감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흄은 이것이 도덕 판단의 토대라고 보았다. 이성은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이라는 두 단계를 거치며 패턴을 알아차리는 기능일 뿐, 가치의 원천은 아니다. 흄이 생각한 가치는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반응하고 공감하며, 그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으로 부여하는 것. 흄에게 가치는 이성이 아닌, 정념과 공감으로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한 온갖 어려운 단어들, 그러니까 '인상(impression)', '정념(passion)', '관념(idea)', '공감(sympathy)', '이성(reason)' 모두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흄이 말한 ‘인상’은 경험이 남기는 생생한 첫 흔적이자 최초의 경험 그 자체, '정념'은 그 경험에서 솟아난 감정, '관념'은 인상을 구조화한 생각이다. '공감'은 정념이 타인과 공유되며 확장되는 과정이고, '이성'은 관념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흄은 이 모든 것이 인상과 관념, 즉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으로 보았고,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흄을 '경험주의’ 철학자로 배운다. (그러나 그를 경험주의 철학자로 배운다 하더라도, 불쌍한 고양이를 잊지 않았다면 그래도 MBTI는 반드시 T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2. 윤리는 이성에 세워야한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한편, 흄의 이런 주장을 경이롭게, 동시에 불안하게 바라보던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앞에서도 수차례 언급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이다. 분명 칸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었고, 분명 지나쳤다고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를 다루지 않고는, 도저히 철학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칸트는 흄이 말한 '사실'에서 '당위'를 도출할 수 없다는 선언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흄의 책을 읽고, 독단적인 잠에서 깨어났다.'


칸트는 '이성의 수호자'였다. 그리고, 초기에는 '형이상학' 역시 '이성적 체계'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흄은 인과성조차 반복된 경험에서 형성된 심리적 습관일 뿐, 그것이 논리적·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 참임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칸트는, 흄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경험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설정하였다. 그것이 앞에서 언급한 '물자체'이며, 우리가 이성으로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을 규정하였다. 그러니까, '검증할 수 없는 사변을 직관이라는 핑계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앞서 윤리를 선언하기 위해 저마다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형이상학적 기반과 선언하는 가치가 얼마나 그럴듯한가?'를 두고 싸우는 것은, 이로써 무의미해졌다.(주의: 칸트는 윤리학을 위해 형이상학을 설득력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한 것이지, 형이상학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한 것이 아니다.) 이를 다룬 저서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순수이성비판》이다.


이처럼 이성의 한계를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여전히 이성의 수호자이다. 왜일까? 그것은, 이러한 비판을 통해 역설적으로 본인의 철학을 '경험'이 아닌 '이성'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흄은 이성이 불안정함을 이야기했지만, 칸트는 이성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규정하였다. 그러나 칸트의 '비판'은 이성을 수호하기 위한 건설적인 비판이었다. 앞에 '존재론이란 무엇인가'에서 다룬 것을 되돌아보자. 칸트는 우리가 인식으로 탐구할 수 없는 것(형이상학적 세계)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탐구할 수 없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 무엇(인간의 인식)을 탐구해야하는지 알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이뤄냈다. 앞서 존재론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표현했던, 이 내용에 대해서, 지금부터 예시를 들어보겠다.


칸트 이전, 세계를 관찰(자연철학)하거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윤리학)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이전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형이상학적 토대에 기반(진리, 존재, 이데아, 신 등)하여 대답을 내놓고는 했다. 그들의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검증할 수는 없지만, 그 주장과 가치가 얼마나 그럴듯 한가?'에 따라 받아들여지고, 비판받고, 계승되곤 했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세상의 호두과자를 관찰해보니, 우리가 받을 다음 호두과자의 모양도 호두 모양일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직관은 그럴 듯 하고, 설득력 역시 있지만, 그것이 '참'이라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흄의 비판).


그래서, 칸트는 질문을 바꾼다. '우리는, 다음에 호두과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하고, 그 모양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예측할 수도 없다. 호두과자의 반죽(경험/감각적 질료)은 유동적이고, 우리가 이 유동적인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반죽'을 우리가 어떻게 조형하느냐는 '인식의 틀(인식의 선험적 형식)'에 있다. 그러니까, 다음번에 나올 호두과자의 모양을 예측(자연철학, 윤리학에 대한 주장)하고 싶다면 반죽이나, 지금까지 만들어진 호두과자들을 보고 그 완성품을 예측할 것이 아니라 선험적 인식의 틀(호두과자 빵틀)을 보고 호두과자(현상:Phenomenon)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예측하라. 그러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직관이 없더라도 자연철학(순수이성비판)과 윤리학(실천이성비판)을 다룰 수 있다.'


※ 참고로, 대중적으로 '인간의 선험적 인식의 틀'이라는 표현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인간의'라는 표현이 마치 '인식의 불완전성이나 상대성, 감각기관의 미비함'을 논하는 것으로 오해를 사기 때문이다. 이는 칸트를 불가지론자나 상대론자, 인식론적 회의주의자로 오해하게끔 만드는 중대한 오류이다. '선험적 인식의 틀'에서 논하는 내용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인간의' 인식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이나 '오감'보다는, '시간', '공간', '인과성' 등 '자연', '논리', '우주의 법칙'으로 생각하는 개념들을 말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여야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칸트의 문제 해결 방식이 등장한다. 칸트가 보기에, '윤리'라는 숭고한 가치를 '경험'과 '정념'이라는 불안한 토대에 올려놓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그래서 칸트는 누구보다 흄의 논리를 깊게 이해하고, 윤리를 이성의 영역으로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했다. 먼저, 그 사전작업으로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주제넘게 이성으로 형이상학적 세계를 탐구하다 흔들리지 않도록, 물자체라는 완충지대를 설정했다. 그리고 흄이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사실', 사실 대신 제시했지만 불안하고 흔들리고 가변적인 '경험' 대신에, 단단해진 이성(칸트는 이를 선험적 이성, 혹은 순수 실천 이성이라고 표현했다. 선험적이란, 우리가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논리의 영역, 정확히는 논리보다도 근본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이성적 판단 그 자체를 구성하는 영역이다.)의 위에 윤리를 세울 위대한 도구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언명령'이다.


1. 네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2.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는 '네가 알아서 합리적으로 판단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네가 합리적으로 판단한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게 행위하라'고 한다. 이는 '나의 행동이 모두에게로 확장되더라도, 논리적 모순이나 충돌 없이 적용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흄이 '공감'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어떻게 개인의 도덕이 보편성을 얻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칸트의 이성적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흄이 감정의 공유에서 그 답을 찾았다면, 칸트는 보편화를 통해 논리적 모순과 충돌이 없는지를 따지는, 순수 이성에서 그 길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 모순만 없으면, 무엇이든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허점을 메우기 위해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명령을 추가로 제시했다. 독립된 문장으로만 보면, 첫번째 명령과는 달리 기독교적 세계관 혹은 인간의 막연한 윤리 개념으로부터 억지로 끌어온 가치판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칸트답지않다.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채 '호소'하는 것은 칸트의 방식이 아니다. 사실, 이 두번째 원리는 첫번째 원리에 내재되어있는 명령이다. 생각해보자. '입법 능력(이성과 자율성으로 스스로 도덕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체', 즉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을 세울 수 있는 주체'가, 그 '만들어낸 준칙의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될 수 있겠는가? 잘 생각해보면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다른 입법자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세운 준칙은 다른 보편적 입법자(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해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모든 보편적 입법자(인간)는 다른 입법자가 세운 법률의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한다'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완성된다. 잠깐, 여기서 혹시 '입법능력(자율성+이성)을 사용해서 윤리를 만들었으면, 이건 입법자의 자율성과 이성을 '수단'으로 사용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수단'과 '목적'을 이렇게 이해해보자.


목적: 준칙이 추구하는 목표 그 자체. 따라서 준칙의 달성을 위해 절대적으로 훼손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것.

수단: 준칙이 추구하는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 따라서 준칙의 기능을 위해 훼손이나 변경될 수 있는 것.


자, 이제 다시 읽어보자. 법칙을 만드는 입법능력(자율성+이성)이 법칙의 기능을 위해 훼손 가능한 도구일 수 있겠는가? 입법능력, 즉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은 인간 본성이 추구하는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1. 누가 법칙을 만드는가?: '입법 능력'(이성과 자율성)을 가진 주체, 즉 인간.

2. 법칙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법칙을 만드는 '입법 능력' 그 자체를 보존하고 존중하는 것. 만약 법칙이 그 법칙을 만든 '입법 능력'을 파괴하거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모순된 법칙이 된다.

3. 법칙은 어떤 속성을 지녀야하는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어야한다. 즉, 나의 법칙이 타인을 '수단'으로 대한다면, 타인의 법칙이 나를 '수단'으로 대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므로, 나의 법칙은 타인을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4. 논리적 귀결: 따라서, '입법 능력'을 가진 모든 주체(모든 인간)는, 그 어떤 입법자가 세운 보편적 법칙 아래에서도 결코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언제나 '목적'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두 정언명령이 같은 것이라는 나의 주장은 뇌피셜이 아니다. 실제로 칸트 자신이 '둘은 같은 말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칸트는 위대한 천재라서 우리를 배려하기 위해 '둘은 애초에 같은 말이긴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오해할까봐 아주 친절하게 다른 형식로 한번 더 진술'했을 뿐이다. 그러나 후대 철학자들은 둘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그러니까, 칸트가 직관으로 당연하게 뛰어넘어버린 그 강을 건널 다리를 건축하기 위해―수백 편 이상의 논문을 써야만 했고, 심지어 현재도 '둘이 정말 같은 말인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다.(원래 철학은 쟁점이 없어보여도 논쟁을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학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칸트에게나 후세 철학자들에게나 지난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정언명령'을 통해서 칸트는 흄이 경험과 감정에 기반한 '가치'로 올려둔 윤리를,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 이성적, 합리적 토대 위에 세우는 것(정초)에 성공했다.(정초란, 초석을 정하다 라는 뜻으로, 이후의 모든 윤리적 논의는 칸트의 토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신, 칸트의 정언명령은 그 도덕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지키기 위해, 그만큼 '도덕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을 대폭 축소했다. 칸트에게는 동정심과 같은 감정, 자기만족과 같은 욕망, 결과에 근거한 판단은 도덕적인 판단이 아니다. 예외성, 상황성, 맥락성 역시 도덕 판단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도구적 판단, 실용적인 도덕 역시 칸트의 도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 말랑말랑한 것들은 흄의 단두대 앞에서 잘려나갈, 가치에 기반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윤리는 '간단하고 보편화 가능한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도덕의 유연성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를 다룬 저서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다.


현대 윤리학은 어떻게 보고있을까? 현대 윤리학은 칸트와 흄 모두를 포용하고 있다. 흄은 도덕 판단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발생의 매커니즘을 규정했고, 칸트는 그 발생된 도덕 판단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보편화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고 본다. 그러니까, 결국 '감정'과 '이성' 모두 도덕의 근원이 된다는,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뻔해보이는 이야기'의 정당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몇 권씩 책을 쓰고, 수백페이지에 걸쳐 논증하는 것이 바로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다.


다시 교실로 돌아와서, 학생들이 '그래서 제가 그걸 왜 해야 하는데요?'라고 물으면 흄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네가 그걸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긍정적이고 좋은 감정을 주기 때문이란다.' 반면 칸트는 근엄하게 말할 것이다. '그것이 너의 감정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이성적 존재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이렇게 말한다. '지금 말꼬리잡고 핑계댈거야?" 이것이 그들이 위대한 철학자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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