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철학자,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앞선 장에서 '존재'와 '윤리'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유령을 쫓았던 철학의 역사를 잠시 산책했다. 데카르트, 흄, 칸트, 하이데거. 그들이 세운 형이상학, 윤리학이라는 대성당은 너무나 장엄하고 논리적이어서, 때로는 비인간적인 신의 건축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완벽한 건축물을 그린 것은, 시대를 살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때로는 나약했던 한 명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다. 철학은 진공 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인간의 고뇌와 시대의 그림자를 먹고 자란다. 그래서 잠시, 그 거대한 건축물에서 눈을 돌리고 그것을 지어 올린 위대한 건축가와, 위대한 파괴자. 헤겔과 니체의 인간적인 뒷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들의 위대한 철학이, 실은 그들의 가장 깊은 인간적 모순 속에서 피어난 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삐딱한 가설과 함께.
【제1부 - 제4장. 가벼운 철학 산책: 철학자들】
스물 네 번째 글: 헤겔과 니체: 철학자와 철학자,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철학자가 있다. 거대한 체계를 세우려 애쓰는 자, 그리고 그 체계를 부수고 자유로운 정신을 외치는 자. 헤겔과 니체는 이 두 극단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들의 철학 이면에 놓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본다. 그들의 위대함은 바로 그 인간적인 모습에서 피어난 것이 아닐까.
왜 헤겔의 철학은 그토록 방대해야만 했을까?
헤겔의 철학은 흡사 거대한 대성당과 같다. 존재, 정신, 역사, 국가, 예술, 종교... 그의 철학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완결시키겠다는 집념에 가까운 의지가 느껴진다. 그가 그려낸 철학적 세계는 세상의 모든 현상이 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완벽하게 연결된 거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그 방대함 속에서 숨겨진 하나의 간극을 숨길수가 없다. 바로 헤겔 자신이 '순수하게 사유한 진리'와 '시대가 듣고 싶어 했던 대답' 사이의 아득한 간극이다.
헤겔이 살았던 19세기 초 독일은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지식인들은 통일된 국가와 안정적인 체제를 갈망했고, 헤겔 역시 그 시대의 요청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명의 지식인이었다. 순수한 '이념'의 세계와 혼란스러운 '현실'의 세계, 그 거대한 간극 앞에서 그는 철학적 양심과 시대적 사명 사이에서 깊이 고뇌했을 것이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헤겔은 수많은 개념적 장치를 동원했다. 모든 모순과 대립(정-반)이 결국 더 높은 차원의 조화(합)로 나아간다는 변증법(Dialectic), 그리고 세계의 역사가 이성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깨달아가는 최종 목적지인 절대정신(Absolute Spirit), 그리고 그 절대정신의 현현이 바로 프로이센이라는 선언까지. 이 모든 장치들은 불완전한 현실을 이성적인 필연성으로 포장하고, 그 간극을 봉합하는 아주 정교한 수술용 실이다. 그 봉합은 너무나 정교해서, 마치 완벽한 논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완벽함이야말로 헤겔 철학의 가장 큰 모순이 되었다. 모든 것이 필연적이고 모든 모순이 결국 화해에 이른다는 닫힌 체계, 정확히는 목적론적으로 완결되어 보이는 체계는, 반대로 현실의 모든 부조리와 억압까지도 '이성의 전개 과정'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위험한 문을 열어버렸다. 게다가, 절대정신이 중국, 그리스, 로마, 게르만을 거쳐서 때마침 공교롭게도 프러시아에서 완성되었다는, 이 완전무결한 선형적 흐름. 아무래도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결국 헤겔의 절대정신은, 시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듣고싶은 말을 해주기 위해 철학이 발명한, 가장 장엄하고도 위험한 알리바이가 되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을 통해 진리를 건설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완벽함이라는 이름의 허상을 덧씌워버린 너무나도 인간적인 철학자였다.
왜 니체의 철학은 그토록 난해해야만 했을까?
니체의 글은 헤겔의 대성당과는 다르다. 마치 폭발하는 파편들로 이루어진 불규칙한 예술 작품 같다. 짧은 격언인 아포리즘, 시적인 비유, 날카로운 비난, 그리고 의도적인 난해함. 많은 독자들이 그 앞에서 좌절하지만, 그 난해함 속에는 니체라는 인간의 깊은 고통과 모순이 숨어있지 않을까?
니체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졌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사람들에게 알려야할 의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철학적 깨달음이 '쉽게 얻어지는 것'으로 전락하거나, 자신에 대한 '무비판적인 동의'로 채워지는 것을 극도로 경멸했다. 그는 자신이 무시했던, 헤겔처럼 '쉬운 답을 파는 철학자'가 될까 봐 두려워했을 것이다. "내가 친절하게 설명하여 '아하!' 하고 따라오는 대중은, 결국 나를 또 다른 우상으로 만드는 무지한 적과도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에게 철학은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이 아닌, '스스로 치열하게 사유함으로써 얻어내는 통찰'이어야만 했으니까.
또한 그는 우매한 대중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아무도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알아주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고독한 개인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솔직하게 선언하는 데는 용감했지만, 그 가치가 오해받거나 자신이 경멸하는 대상과 동일시되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차피 나는 오해받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스스로에게 방어기제를 입힌다. 그의 난해한 글쓰기는 단순한 학문적 방식이나 취향이 아니라, 자신을 손쉽게 소비하려는 군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자신의 사상이 가볍게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는 치열한 자기 방어이자 인간적인 모순의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대중은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똑똑한 이들은 자신의 철학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냉소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는 '인정받고 싶은 유혹, 자신의 철학을 이해시켜야한다는 숙명', 그러나 동시에 '쉽게 건네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과 '오해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자아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스스로는 '이해받는 것이 오해받는 것보다 두렵다'고 말했지만, 그 말과는 달리 그는 글을 세상에 내보내는 일에 집착했고, 말년에는 단어 그대로 미쳐가는 상황에서도 책을 출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의 난해함은 바로 그 인간적 투쟁의 흔적이다. 만약 옆의 친구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이래도 난리, 저래도 난리' 라고 쿠사리를 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체는 위대한 철학자였고, 그 난해함과 고통, 모순,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조차 얄팍하지 않았다.
철학자,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헤겔은 '완벽'을 추구하며 모순을 봉합하려 했지만 그 완벽함 자체가 모순이 되었고, 니체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강요했지만 그 고통 속에는 더 깊은 고독을 두려워하는 인간적 고뇌가 뒤섞여 있었다. 그들의 위대한 철학은 이상적인 추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고뇌와 모순이라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꽃일지도 모른다. 철학자는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시대를 살아가고 욕망하며 고통받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그들의 삶과 철학이 증명하고 있다.
혹시나 이 글에서 헤겔에 대한 미묘한 거부감과 니체에 대한 은근한 연민이 느껴졌다면, 그렇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