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영원을 긍정하라

by 피디아

우리는 바로 앞에서 니체의 난해함이 실은 그의 가장 깊은 '인간적인 투쟁'이었음을 엿보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난해함은, 그가 말하고 싶었던 했던 진실이 너무나도 위험했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최후의 안전장치'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신은 죽었다"는 그의 가장 유명한 선언을 열쇠 삼아, 니체가 겹겹이 걸어 잠근 논리의 문을 열어보고자 한다. 인류를 거대한 허무와 동시에 위대한 자유 앞에 세웠던 거인, 프리드리히 니체. 그가 잠궈버린 문 너머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제1부 - 제4장. 아주 쉬운 철학 산책: 니체】

스물 다섯 번째 글: 지금, 여기, 영원을 긍정하라


요즘 가장 핫한 철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앞에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니체는 너무 멋있다. 광인의 천재, 멋들어진 콧수염, 자신을 불살라가며 치열하게 사유했던 철학자, 너무나 천재적이어서, 끝내 미쳐버렸다는 전설적인 일화까지. 니체는 어쩜 이름까지 '니체'일까?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니체의 원전을 제대로 완독하지 못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너무 난해해서 몇 장 넘기다 포기했고, 책장 데코레이션으로 쓰고 있다. 그나마 버겁게 읽어낸 책들은, 완독이라기보단 꾸역꾸역 밀어넣은 것에 가깝고, 그 내용들은 머릿속에서 금방 휘발되었다. 결국 내가 아는 니체는 대중 철학서나 요약본을 통해 알게 된 몇 가지 강렬한 개념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니체는 문학적이고 암시적인 문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기에, 그 철학의 진정한 의미나 가치보다는 광기의 천재이자 기존 질서에 대한 파괴자, 혹은 반항아라는 이미지로 소모되는 경향이 많다.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겠지만 동시에 합리화하자면, 학계 역시 그의 구체적인 논리보다는 개념의 파격성과 철학적 이미지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논문계의 맛집이자, 철학계의 BTS일지도 모른다. — 누구나 한 번쯤 인용하고,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그런데 그 파편적으로 주워들은 개념 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우주의 조합 가능한 경우의 수는 유한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무한하므로,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일련의 순환을 통해 동일한 순서로 영원히 반복된다."


대부분의 책들은 이 개념을 "그러므로 네 삶의 모든 순간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 해도, 그것을 긍정할 수 있도록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라"라는 윤리적 교훈으로 설명한다. 처음에는 멋지고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해석에는 사소하게 넘길수도 있지만 절대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찜찜한 의문이 하나 남는다.


니체. 너무나 천재적이어서 미쳐버렸다는 철학자. 인류의 모든 낡은 도덕을 망치로 두들기던 그 파괴자가, 고작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는 공허한 응원을 하기 위해, 그토록 난해하고 허구적인 개념을 만들었을까? 누구보다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증오했던 그가, 형이상학 그 자체인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이라는 가정을 했다고? 새로운 도덕 법칙을 세우는 것을 경멸했던 그가, '영원회귀를 긍정하며 살라'는 식의 새로운 윤리적 명령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미래에 반복될 삶을 위해 현재에 충실하라는 권고가,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천국에 가기 위해 착하게 살라'는 말이나 플라톤의 '이데아', 그가 경멸하던 노예의 도덕(Sklavenmoral)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가?


어딘가 이상하다. 아무리 신이 죽었다는 선언 이후의 허무주의를 극복할 필요성이 있었을지언정, 그 방식이 이토록 허술할리는 없다. 심지어 영원회귀는 니체 스스로의 자서전인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이며, 삶을 긍정하는 최고의 공식"이라고 밝혔을 정도로 자랑스러워하던 중요한 사상이었다. 그런 영원회귀를 고작 윤리적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니체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해석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영원회귀는 사실인가?" 대신, "만약 '영원'이라는 게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 대부분은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영원'을 무의식적으로 가정하고 살아간다. 천국이든, 윤회든, 설령 믿지 않더라도 죽음 앞에서의 공허한 소망으로. 심지어 나 자신이 없더라도 끝없이 흘러갈 시간과 후손에 대한 막연한 상상으로. 하지만 니체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그 누구도 천국, 윤회, 그 어떤 사후의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다. 사후의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없는 이후의 시간과 세계에 의미가 있을 리 없다. 죽음은 끝이다.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끝.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사유를 다시 시작해보자. 세상에 '영원한 없음(죽음)'과 '찰나의 있음(삶)'이라는 두 가지만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마치 숫자 '0'과 '1'의 관계와도 같다. 이때 '1'은 '0'보다 얼마나 큰가? '1'만큼? 아니다. '1'은 '0'보다 무한히 크다.


삶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절대적인 없음'이라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은 그 없음에 대비되는 유일한 '있음'으로서 그 자체로,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Das grösste Schwergewicht)'라 명명했던 바로 그 '영원'의 무게를 갖게 된다. 삶의 매 순간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 무한의 가능성이며, 그 시간성은 영원성이 된다. 미래에 회귀할 영원이 아니라,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그 영원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직관으로 깨우쳤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현재의 무게감이 이데아나 천국같이 뜬구름잡는 소리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라는 식의 한낱 듣기 좋고 말하기 좋은 교훈으로 소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증오했다. 그래서, "당신의 삶은 그 자체로 영원하다!" 따위의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선언 역시 하지 않았다.



대신 니체는, 영원한 삶의 필연성을 납득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깨달음을 거부할 수 없는 구조로 끌어올리기 위한 압도적인 상상 실험을 제시한다. '만약 너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리고, 자신의 시대가 가장 신뢰했던 언어—물리학, 에너지 보존, 원자론—을 끌어와 이 개념에 존재론적 필연성을 부여하려 했다. 그것이 바로 '영원회귀'.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전략이었다. 그 시대의 과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삶의 영원성'을 비유가 아닌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설득력있는 도구였다. 니체의 원전에서도 얼핏 드러나지만, 니체는 과학적 사고도 진정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단지 니체는 과학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관을 납득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과학을 이용해서, 직관으로 날아올라 깨달은 '영원'에 도달할 사다리, '영원회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시도는 실패했다. '영원회귀'는 니체가 시대의 목에 들이밀기 위해 공들여 벼려내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그의 수많은 위대한 통찰 가운데서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뜬구름 잡는 소리, 니체가 그토록 경멸하던 도덕적인 좋은 말로 남게 되었다.


그 둘이 뭐가 그렇게 다르냐고? 와닿지 않는다면 이렇게 표현해보자. 우리는 가끔 보도블럭을 밟으면서 이런 상상을 한다.(아, 나만 그럴수도 있다.) '이 보도블럭만 밟고 저기까지 가는거야. 이 옆은 100미터짜리 낭떠러지라고 상상해야지.' 그 순간, 니체가 옆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아니, 이 보도블럭은 정말로 100미터짜리 낭떠러지 위에 설치된 보도블럭이다. 그리고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진실이다. 발을 헛디디는 순간, 너는 죽는다.'


이제 니체의 질문은 완전히 다르게 들린다. 그의 질문의 진정한 의미는 "네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괜찮은가? 여러번 살아도 만족할 만큼 멋지게 살아라!"라는 순진한 물음이나 멋쟁이의 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는 너의 죽음을, 그 어떤 위로도 없는 완전한 '없음'으로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가? 그래서, 너에게 주어진 이 단 한 번뿐인 삶이, 너의 유일한 '영원'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훨씬 더 근본적이고 처절한, 신이 죽은 세상에서 허무에 맞서기 위한 니체의 전투적인 질문이자, 삶을 긍정하기 위한 최고의 공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니체의 질문에 긍정한다면 ― 그러니까 '영원회귀'가 '지금 이 순간'의 절대적인 무게(Das grösste Schwergewicht) 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 우리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니체의 명령은 확고하고, 동시에 유일하다.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 힘에의 의지를 통해, 지금이라는 유일한 영원을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조하고, 외부의 간섭에 대해 투쟁함으로써 나의 삶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는 것. 그냥 멋지게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나 이데아같은 형이상학적 가치관을 절대적으로 배제하고 이 순간의 무게를 직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이 죽은 세계에서 니체가 제시한 유일한 생존법이다.


사실 '힘에의 의지'는 니체의 많은 사상중 가장 문제시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힘에의 의지'는 나치에 의해서 전용되고, 왜곡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니체의 철학의 저변에는 귀족주의, 엘리트주의, 강자독식주의가 깔려있다는 것 역시 완벽하게 부정하기 어렵다. 심지어, 스스로의 사상에 '노예도덕', '주인도덕' 등의 귀족적인 어휘를 사용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후대의 철학자들은 니체의 위대한 철학은 존중하였지만, 니체의 철학 가운데 왜곡되거나 도덕적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힘에의 의지는 다소 막연하게 서술하거나 좋은 도덕적 선언으로 순화하는데 그치곤 했다. 그것이 니체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의 사상을 자신의 취향에 알맞도록 시행한 사상적 거세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힘에의 의지'는 '권력'과 '지배'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로 인해 유발된 '권력'과 '지배'는 타 주체들이 나를 억압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행위에 저항하고, 나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외부로 자연스럽게 투사된 결과물일 뿐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권력과 지배를 힘에의 의지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역시 '타의 가치에 대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즉, 니체에게 권력과 지배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파생되는 부산물일 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부산물이 니체 특유의 귀족주의, 엘리트주의, 약자에 대한 경멸(여기서 약자는 힘이 약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타인의 가치에 수동적으로 휘둘리는 수동적 주체를 의미한다.)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니체의 경멸은 관계적으로, 사회적으로 지배당하는 약자를 향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 의해 지배당하도록 스스로를 규정짓는 내면적인 약자를 향하는 것이다. 니체는 다짜고짜 남들을 지배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지배를 당할 바에는 차라리 지배를 하라'고 했다. 이렇게 표현하면 조금 더 명확할지도. 니체가 스스로의 도덕을 '귀족'과 '노예'로 명명한 것은, 단지 귀족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단어 그대로 '주인'의 정의 그 자체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귀족주의, 엘리트주의적으로 전달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배당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 즉, '힘에의 의지'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자신에게 부여된 '영원한 삶'을 스스로의 의지로 완벽하게 빚어내고, 자신을 억압하는 외부의 모든 구속과 퇴폐에 단 한순간도 패배하지 않고 매 순간 극복해내며, 그렇게 스스로 창조해낸 모든 가치, 즉, 스스로를 오롯이 긍정하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Übermensch)'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은 더 이상 네 개의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논리적 사슬이자 퇴로없는 하나의 귀결이다.


신은 죽었다 ― 초월적 영원은 없다.

영원회귀 ― 그러므로, '지금'이 유일한 영원이다.

힘에의 의지 ― 그러므로, 너에게 주어진 영원이 갖는 가치를 너의 의지로 창조해야 한다.

초인 ― 그리고 마침내, 그 창조된 너 자신을 온전히 긍정하는 자가 되어라.


그렇게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운명을 사랑(Amor fati)하는 이가

삶의 주인으로서 능동적으로 창조해내는 가치가 바로 '주인 도덕(Herrenmoral; 창조, 지배, 긍정)'이며,

약자들이 스스로의 패배를 정당화하고, 강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만든 덕목이 '노예 도덕(Sklavenmoral; 복종, 순응, 믿음)'이다.


이것이 '신'과 '내세'가 없는 세계에 '지금'을 획득하고, '원죄'대신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믿음' 대신 '의지'를 통해, '구원' 대신 '초인'에 이르는, 기독교 복음(Gospel)의 완벽한 '대체재(Anti-Gospel)'이며, 신(Christ)이 죽은 세계에서, 니체 본인이 안티-크리스트(Anti-Christ)로서 인류에게 주고자 한 바로 그 가장 큰 선물이다.


그러나, 이를 니체에 대한 온전한 복원이라고 하기엔 어려울지도 모른다. 니체의 철학은 문체와 모순, 난해함과 파편적 성찰을 포함한다는 것이 주류 해석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니체는 난해했고, 흐트러뜨렸으며,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철학을 쉽게 전달하려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철학은 그런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본인 철학의 난해함을 어느정도 수긍하고(그러니까, 하도 못알아들으니까 본인도 답답해져서), 나중에는 해설서 격의 책들을 쓰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친절하고, 어조는 공격적이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대중들과 타협을 하지 않고 내부적 모순과 파열을 통해서 해석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자기 자신조차도 독자들에 의해 극복되어야할 그 무엇으로 설정해버렸다. 그러니까, 그 모순과 파열 역시 니체에게는 철학의 완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철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정렬하는 이 시도는, 그 자체로 니체 철학의 역동성을 제한하기 때문에 니체의 정신을 온전히 해석하기에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다. 다소 경박하게 표현하자면, '니체는 해석이 중구난방이고, 읽을수록 혼란스러워야 니체답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니체가 노렸던거고.' 뭐 이런 뜻이다.



내가 한 것은 니체에 대한 복원이 아닌 '번역'의 시도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남겨둔 난해함의 안개를 걷어내고 논리적 구조를 드러내는 시도. 니체는 전달되는 대신 통찰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해석이 필요한 방식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만약 이 번역이 맞다면, 그리고 이것을 단순한 '우아함'이 아닌 니체라는 냉철한 논리학자가 시적인 언어 뒤에 숨겨놓은 날카로운 칼날로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그동안 모순과 비유, 광인이라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칼날같은 논리의 구조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 번역에 150년이 넘는 세월이 소요될 줄은, 자신의 노림수가 이렇게까지 과도하게 성공적일 줄은 니체 자신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가 광인이라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의 천재성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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