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동물만 설 수 있는 동물보호 런웨이
하프물범을 본 적 있는가?
없다면 다행이다. 한 번 보면 보호본능이 폭주해서 지갑과 눈물샘이 동시에 열릴 수 있다. 말랑한 떡 같고, 표정은 세상 다 가진 듯 평온하다. 인스타가 있다면 얘는 하루에 4번씩 셀카 올릴 외모다. 하프물범 보호하다 내 지갑이 보호대상이 될 지경이다.
그래서 그런가? 그 귀여운 동물이 멸종위기에 처해있나 보다. 동물보호단체들은 하프물범을 열심히 지키려 한다. 하프물범 살리기 캠페인, 거리에서 펼쳐지는 불매운동, 감성적인 피켓. 참 감동적이다.
그런데
짜잔- 하프물범은 멸종위기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하프물범의 멸종위기 등급은 IUCN 기준, '최소관심(Least Concern)'. 이것은 이런 의미이다.
'음... 솔직히 관심 가질 필요가 크지 않긴 해. 그런데 그래도 관심 갖지 마세요 하는 것은 너무하잖아? 그러니까 최소 관심이라고 붙여놓은 거야' 이 등급에 해당하는 동물로는 참새, 시궁쥐, 황소개구리, 그리고 [인간] 등이 있다.
그럼... 저 단체는 왜 하프물범을 보호하려고 하지?
물론, 모든 동물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보호의 ‘우선순위’는 생긴다.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원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단체 회원들이 설령 지구를 지키는 슈퍼 사이어 아이언맨이라 하더라도 북극에서 하프물범 수호 캠페인을 하면서, 동시에 한국에서 도롱뇽을 위한 개발 반대 시위에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원도 마찬가지고, 자본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동물을 먼저 보호해야 할 것인가?
이왕 보호할 거라면, 멸종 위험이 높거나, 생태계 내에서 핵심적이거나, 인간과의 공생도가 높은 동물이어야 한다. 그게 일반적 기준이다. 그런데, 하프물범은 이 중 어디에도 명확히 해당되지 않는다. 유일한 무기는 ‘귀여움’이다. 귀엽기 때문에 구조되고, 보호되고, 상품이 되고, 얼굴마담이 된다. 귀여움은 방패고 무기다.
이쯤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보호하자는 건 좋은 일이잖아.”
맞다. 좋은 일이다. 문제는 다른 쪽이다. 귀엽지 않은 동물은?
못생긴 개구리는 누구도 지키지 않는다.
기괴한 곤충은 포스터에 실리지 못한다.
도롱뇽은 하프물범처럼 웃지 못한다.(우파루파 빼고)
그러니 자원이 있는 곳엔 귀여운 얼굴이 먼저 놓이고, 존재만으로도 거부감을 주는 동물들은 뒷순위로 밀려난다. 그들도 멸종위기일 수 있음에도.
이 현상은 ‘귀여움의 외모지상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다소 건조한 편이다. 생물학, 진화론, 사회문화적 기제에서 외모 선호는 어쩔 수 없다. 인정한다. 그러나 ‘지상주의’, 즉 외모 하나에 모든 판단을 맡기면 다른 가치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귀여운 동물의 독점적 보호다.
이건 비단 동물만의 일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 보호 캠페인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본다.
사연 있는 귀여운 아이, 일그러진 얼굴의 피해자. 극단적인 이미지와 감정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호하는 기준이, 실제 필요보다 이미지 우선으로 작동하는 순간들.
이는 인간의 본성상 매우 전략적인 선택이기는 하다. 사람들은 합리성보다는 이미지에, 팩트보다는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취약계층 홍보 캠페인은 이런 본성을 파고든 전략적인 방법이다. 당장 나라도 저런 자극적인 글을 먼저 클릭할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만일 것이다.
다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런 선택은 인간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윤리적으로는 편파적이다.”
우리는 외모에 끌린다. 감정에 반응한다. 본능은 쉽게 휘둘린다. 누구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자각은 필요하다. 위의 문장은 비판하고자 하는 문장이 아닌 자각하고자 하는 문장이다.
하프물범으로 시작해서 외모지상주의를 지났고 사회취약계층의 지원순위 문제를 거쳐서 이미지에 끌리는 인간본성과 자기 성찰까지 돌아왔다. 나의 생각은 일관적이다. 인간의 본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본성을 의식하고 항상 자신의 판단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어보자
나는 윤리적으로 선택했는가?
나는 논리적으로 판단했는가?
그 누구도 자신이 비윤리적이라고,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 굴레는 나 역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글과 생각이 짧은 식견과 성급한 고민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절대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항상 의심해야 한다.
나는 정말로 윤리적으로 선택했을까?
나는 정말로 논리적으로 판단했을까?
감정은 선택을 이끌지만, 윤리는 그 선택을 의심할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