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로드, 그곳은 지옥이었다

이세계 공주님과 하이틴 로맨스 사이에 떨어진 퇴계 이황

by 피디아

때는 4월 초.

금요일에 브런치 작가 신청을 넣고,

승인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사람 마음이 다 그렇듯, 나도 구글링 해보았다.


'브런치 작가 승인 어려운가요?'


각종 글들이 나왔다.

'한 번에 되는 경우', '10번씩 도전하기도 한다는 경우'

'브런치 작가 승인을 노리는 확실한 방법' 음, 이건 제외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씩 미끄러지는 것이 브런치 작가 승인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게다가 금요일에 승인 신청을 했으니 주말 간 초조함이 커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다시 한번 검색해 보았다.


'브런치 같은데 브런치보다 쉬운 플랫폼은 없을까요?'

나는 먼저보다 초조해진 심정으로 검색창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한참을 인터넷을 뒤적뒤적하던 도중, '밀리로드'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한창 핫한 밀리의 서재에서 야심 차게 추진하는 프로젝트, 지원도 빵빵, 별도 승인 없음, 그냥 잘 정리해서 올리기만 하면 된단다.

나는 브런치 작가 승인이 나기 전에 글이라도 남기고 싶었고,

그래서 그날 밤, 무려 18편의 원고를 밀리로드에 투척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작은 재난의 시작이었다.




깊은 생각 없이 밀리로드에 글을 업로드 한 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뱀파이어 이야기, 옆나라 왕국의 공주님, 잔혹 괴물이야기, 말랑말랑한 감성 에세이...

이성의 끈을 붙잡은 나는, 그제야 내가 올린 글을 돌아보았다.

민주주의, AI와 책임구조, 합리성과 비이성, 그리고 퇴계 이황.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나는 들어와서는 안될 곳을 들어온 것이 아닐까?

정확히 12분 동안 고민하고 글을 내리려는 찰나, 숫자가 바뀌었다.


"조회수: 1"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때부터 나는 밀리로드를 계속해서 확인했다. 밥 먹고 한번, 저녁에 자기 전에 한번, 카톡 볼 때 한번, 인터넷 들어가려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한번, 하루에도 여덟 번은 확인했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조회수의 70% 이상은 내가 올린 것이리라.


그럼에도 내면 어딘가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글은 단단한 셋업 슈트에 회색 넥타이까지 맨, 그야말로 ‘정장’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누가 봐도 선크림 냄새나는 하와이안 비치였다. 비키니를 입고 세미나에 가는 것이 수치스러운 만큼, 양양 해변에 정장을 입고 가는 것도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장을 입은 채로 어쭙잖은 플러팅을 하고 있었다. '자기야, 여기 겨울왕국은 없고... 대신 단팥빵 먹고 갈래?'




결국, 작가승인 신청을 하고 4일이 지난 뒤 화요일, 브런치 작가로 승인되었다는 푸시 알림이 왔다. 나는 브런치에 글을 업로드하고, 그날 저녁 잠시 묘한 승리감과 민망한 해방감을 안고 잠시 고민하다가 밀리로드에 업로드한 글을 모두 내렸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존감이란 것도 그리 단독적으로 단단하게 설 수 있는 감정은 아닐지도 모른다.

흔히 '마음가짐'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자존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연약하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

'나를 받아주는 공간'

'그리고 작가 승인 같은 외부의 객관적 인정'

이런 것들이 자존감을 실질적으로 떠받치고 있진 않을까.


흔히들 자존감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내가 겪은 짧은 사흘간의 경험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자존감은 나 혼자 다져질 때도 있지만, 주위의 공간을 딛고 살아나기도 한다.

그러면, 진정한 자존감은 내면에서 시작되는 걸까, 외부에서 시작되는 걸까


그에 대한 고민의 답은 아직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의 자존감에 대한 묘한 찝찝함을 품고 밀리로드를 조용히 떠났다


다음엔 정장 입고 해변은 가지 말자.

튜브는 가서 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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