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단의 비이성이 이끄는 정치판
교사는 숫자가 많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교사는 매력적인 공략대상이 아니다. 왜일까? 이익보다 신념과 정의로 투표하는 성향이 강하고, 교육계에서의 내부 이념도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사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집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점이 오히려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이유가 된다. 정치인들은 확실한 감정, 명확한 대립각, 단순한 분노를 원한다. 이성은 애매하고, 애매함은 위험하다. 그 결과 교사는 다수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소외된다.
나는 한때 스윙보터가 가장 전략적인 위치라고 생각했다.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상황에 따라 판단을 유보하는 합리적 중도층이야말로 정치의 중심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스윙보터는 정작 정치인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설득하기 어렵고, 자칫 잘못 건드리면 역효과만 부를 수 있는 벌집 같은 존재이다. 확실히 표를 던져주는 극단의 지지층이 정치적으로 훨씬 효율적이다.
그렇게, 현실 정치는 프레임의 논리로 움직이게 된다. 선명한 구호, 단순한 적대, 감정의 극대화. 이 모든 요소가 실제 정책이나 논리적 설득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라기보다, '크게 외치는 자'가 주도하는 무대가 되어버린다. 목소리가 크고 감정이 격한 소수가, 무관심하고 신중한 다수를 지배하는 구조. 이성은 이 안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각종 선거 후보의 공천, 경선 룰을 당원들이 결정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중도층의 소외가 구조적으로도 심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당의 선택을 받아 선출된 후보들은 본선에서는 중도층에게 그럴싸한 공약을 내세우며 표심을 공략하지만, 그것은 단지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실제 주요 공약의 방향성, 정책 입안 및 시행 과정에서는 결국 양극단의 입맛에 맞춘 정책만이 생산되고 소비된다. 중도층은 언제나 그럴듯한 이야기만 듣고, 실제 영향력에서는 배제된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본래 고성장 시대의 산물이었다. 파이가 계속 커질 때에는 적당히 나눠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지금, 분배는 경쟁이 아니라 탈취가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협의와 조정이 아닌, 선점과 약탈이 중심에 선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도 극우의 대두, 양극단의 정치세력 강화가 뚜렷하다. 미국, 유럽, 남미 곳곳에서 감정적 레토릭과 대중 선동이 중심이 된 정치가 반복된다. 이성적 중도는 외면당하고, 급진적 주장과 단순화된 구호가 지지를 받는다. 이는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구조적 피로를 겪고 있다는 신호다.
플라톤은 멍청한 다수에게 끌려가는 것을 경계했다. 현실은 더욱 참혹하다.
우리는 지금 멍청한 다수가 아니라, 더 멍청한 소수에게 끌려가고 있다.
이제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비이성의 무대를 제공한다. 중도는 타협이 아니라 우유부단으로 보이고, 신중함은 무능으로 읽힌다. 합리주의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며, 오히려 정치적 실패의 요인처럼 취급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종언을 목격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단정 짓기는 이르다. 대중의 성찰, 자기반성, 그리고 비이성에 대한 경계심이 회복된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다만 지금처럼 프레임과 감정의 정치를 방치한다면, 민주주의는 결국 그 본래의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퇴행하고 말 것이다.
이성만으로 세상을 설계하려는 시도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이다.
그렇지만, 체제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가 기대야할 대상 역시 이성과 성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