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화와 대상화, 그리고 윤리의 역설
바른생활 시간에 배웠던 도덕
"다른 사람을 존중해요."
"나쁜 말을 하지 않아요."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도덕시간에 배운 내용일 것이다.
아니, 아마도 더 어린 바른생활 시간에도 들었으리라.
이 단순한 문장들은 오랫동안 우리가 배워온 도덕의 기본이다.
그런데 요즘,
도덕의 이름으로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목소리를 내는 이들 중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게 오히려 가장 날카롭고 단호한 언어를 던지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도덕을 말하는 이들이
왜 때로는 가장 비도덕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까?
단순한 모순일까?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도덕이
어디서부턴가 어긋난 건 아닐까?
타자화와 대상화: 타인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하여
성적 대상화, 문화적 타자화, 인종적 고정관념.
이런 단어들 앞에서 우리는 반사적으로
'문제적이다'라고 반응한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사회적으로 감수성을 가져야 할 사안이라는 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하다.
다만, 나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본질적으로 인간이 타자화와 대상화없이 타인을 인식할 수 있을까?"
조금만 고민해보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인간은 타인을 인식하는 순간,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로 규정된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 매력을 느끼는 것조차 결국 '대상화'의 구조 안에 있다.
타자화는 단지 편견이나 억압의 결과만이 아니라,
인식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기본 조건이다.
소설과 영화,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모든 미디어는 나 아닌 누군가를 느끼고, 이해하려는 거리감의 감각 위에 세워진다.
결국 타자화가 없다면,
우리는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타자화를 없애야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모든 미디어는 1인칭 자아의 반복과 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역설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도, 감정 이입도 불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대상화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도 매력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다름'에서 매력을 느끼고, 표현한다.
대상화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경외심에서 출발한다.
'아름답다', '끌린다,' '인상 깊다'는 감정 역시 거리두기와 해석을 포함한 대상화된 감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나와 같은 존재로 느끼는 순간—오히려 그 순간 표현할 감정은 사라진다.
따라서 '대상화는 곧 억압'이라는 인식 역시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것은 미디어의 복잡성, 인간 인식의 구조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혹자는 어떤 대상화는 다른 대상화와는 구조적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미디어 연출은 언제나 그 경계를 넘나든다.
(이를테면 감탄과 탐닉, 동경과 이상화처럼—서로 다른 감정으로 표현되지만, 둘 다 '비슷한 본질-다른 거리감'의 구분이다.)
중요한 것은 구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느냐에 있다
이런 이유로 "타자화를 없애겠다", "대상화를 부정한다"는 선언은 오히려 이상주의적 외침에 머무르거나,
반대로 '나와 다른 타자'를 추방하는 강압적 규범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우리는 타자화를 없애겠다는 선언보다,
어느 정도로 타자화할 것인가,
어떤 거리와 해석이 윤리적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윤리를 말하면서 윤리를 흩어놓는 순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타자화를 가장 격렬히 비판하는 이들이
때로는 가장 선명하게 타자화를 수행한다.
"너는 누구 편이냐"는 질문 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 넌 구조의 공모자다"라는
판결이 따라오고,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분류하고 추방하는 순간,
타자화는 더 폭압적이고, 더 정당화된 형태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자주 타인의 생각을 바꾸고 싶어한다.
이것은 도덕적 관심이거나,
윤리적 책임감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도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없이, 또는 설득 없이 드러나는 행동만을 바꾸려는 방식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더 이상 제안이 아니라 압력이 된다.
도덕은 상대를 바꾸게 할 때보다,
멈춰 설 수 있을 때 더 윤리적이다.
나도 누군가의 말이 불편할 때,
설득하기 전에 일단 멈추는 순간이 많다.
타인의 생각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 과정과 태도에 진짜 윤리가 담겨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의 본능이라는 도피처
한편, 반대편의 보수주의자들—자칭 현실주의자들은
이 문제들을 너무 쉽게 넘겨버리곤 한다.
"인간은 원래 그런 동물이다"
"남자는 원래 시각적 자극에 반응한다."
"이건 본능일 뿐이다."
그들은 마치 생물학적 사실이
모든 논의를 정리해준다는 듯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내가 생각하는 바와는 다소 다르다.
애초에, '절제', '윤리', '자기 통제'야말로
그들이 강조해온 가치 아닌가?
그들이 수호하려 했던 도덕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막상 불편한 문제 앞에서
'본능'과 '자연'을 핑계로 내세우고,
자신이 주장하는 담론에서만 도덕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호하려 했던 도덕의 무게를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볍게 던져버린다.
이는 도덕의 책임이 아니라
생물학적 자동 반응으로의 도피이며,
결국 인간이 가져야할 윤리적 성찰을 회피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자연으로 떠넘기는 자기면제 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더구나 이들은 종종 상대 진영의 과도함만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표현이 누군가를 어떻게 지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보수의 도덕은
침묵하며 반응하지 않을 자유로,
그리고 책임지지 않을 자유로 변질되고 있다.
그 자유는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우리가 잠시 잊어버린 도덕시간의 기억
우리는 정말로 타인을 나와 같은 존재로 느낄 수 있을까?
그건 어려울 것이다.
타자화와 대상화는 인간 인식의 기본 조건이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고정되고, 누군가를 배제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 구조를 인식하고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되살려야 한다.
나는 어느 한 진영의 말을 따라가고 싶지 않다.
급진은 구조의 해체를 원하고,
보수는 구조의 정당화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불완전한 인식 속에서,
조금 더 성찰하며 판단하고 싶다.
타자화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지만,
그 타자화의 방식과 깊이, 그리고 그에 대한 태도는 내가 선택하는 윤리라고 생각한다.
대상화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대상화가 누군가를 지우지 않도록 인식하고 조율하는 일은 내가 감당할 몫이며,
그것이 진정한 내면에서의 도덕윤리라고 믿는다.
결국, 도덕은 옳음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기보다는
확신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짜로 잃어버린 도덕은,
타자를 해석하는 그 불안정한 거리감 자체를,
배제하지 않고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아닐까.
그래서 다시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을 존중해요."
"나쁜 말을 하지 않아요."
이 문장에 담겨진 깊은 의미는
그 '다른 사람'이 누구이며,
‘존중’이 어떤 거리에서 가능한지를 묻는 일이다.
진짜 도덕은, 우리가 너무 일찍 외우고 치워버린 이 문장을 다시 곱씹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도덕은 타인을 향하는 순간, 때때로 비도덕적으로 변한다.
윤리란 결국, 자신을 향한 질문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