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적인 것을 정량화하려는 시도
어려운 어휘를 접했을 때의 태도는 한 사회의 지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과거에는 모르면 조용히 사전을 펼치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디지털 환경 속에서 성장한 세대에서는, 모름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며, 지식과 지성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반지성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전문성과 논리를 존중하기보다는 감정과 직관을 우선시하고, 아는 사람은 '잘난 척'하거나 '배려 없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이 분위기는 단순한 세대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의 논의와 의사결정 수준을 갉아먹고 있다.
이러한 반지성주의 확산의 배경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반지성주의에 대해 교육은 책임이 없을까?
교육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핵심 체계다. 따라서 교육 제도의 운영이 최근 반지성주의의 심화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충분히 해볼만하다.
교육 체계 중에서도, 특히 평가 방식은 학생들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도 '수행평가'는 현대 교육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수행평가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중시하는 평가로, 학생 개인의 학습 경로와 성찰적 사고를 기록하는 것이 본질이다. 단순히 정답의 암기와 문제풀이 능력만을 측정하는 지필평가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인간적 성장과 창의적 탐구를 가능케 하는 장치이다. 특히 학생부 종합전형이 주요 전형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수행평가는 개별 학생의 과정을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기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수행평가는 점수화의 압력 아래 다시 줄 세우기의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과정이 아닌 결과 중심의 평가로 전락했다. 언제나 그래왔듯, 완벽한 구조도 변증법적인 본성 앞에서는 무력화된다.
1. 교육평가연구에서는, 과정중심 평가, 자기평가를 단순한 평가가 아닌 학습의 과정이며, 자기평가능력을 키워야 할 역량으로 정의하였다.(박정, 2019)
2. 한국과학교육학회 연구에서는, 수행평가가 본래 취지와 달리 변질되는 경향을 지적(김형준 외, 2010)하였다.
여기에 와이너의 귀인이론이 결합되면,
이 두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윤곽을 드러낸다.
학생들은 자기자신을 평가하는 역량을 미처 함양하기 전에,
시스템을 불신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을 먼저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개선책이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평가 기준을 명확히 설정하고, 과정 중심 피드백을 강화하며, 학생의 자기 평가를 촉진하는 방식이다. 평가 기준을 투명화하고 과정 피드백을 통해 점수 중심 사고를 완화하려는 시도는, 실제로 성공적으로 운영될 경우 학생이 자신의 학습 과정을 스스로 점검하게끔 촉진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잘 설계된 수행평가는, 지식에 대한 성찰과 인간적 성장을 기록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도 한계가 명확하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육은 학습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신분 상승을 위한 치열한 경쟁 체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든 평가는 결국 대입 결과로 귀결되고, 학생과 학부모는 과정이 아닌 결과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정교한 수행평가 제도를 마련해도, 점수화와 정량화의 압력 앞에서 본래 취지를 지키기 어렵다. 실패와 탐색, 성찰과 성장의 경험은 점수화된 경쟁 구조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수행평가 본연의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점수로 줄 세우는 시스템에서 독립하여, 학생 개인의 학습 여정과 사유의 흔적을 충실히 담아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해결책은 명확하다.
수행평가와 지필평가를 철저히 이원화하는 것.
수행평가는 정성적 활동으로서 생활기록부에 서술형으로 기록하고, 지필평가는 정량적 결과로 남겨 내신 성적에 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수행평가 → 학생부 기록 (종합전형 중점 활용)
지필평가 → 내신성적 (교과전형 중점 활용)
으로 평가 및 기록 체계를 명확히 분리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각각의 평가가 본래의 목표를 유지하고, 왜곡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현대 교육의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수행평가의 본질적인 기능 회복을 도모하기 위한 첫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원화를 현실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고교 현장에서는 수행평가 결과를 별도 기록부에 관리하고, 생기부에만 정성적 서술로 반영하는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지필평가는 기존처럼 내신성적에만 반영하고, 평가 기록 이원화 여부를 학교 공시 시스템을 통해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아울러 생활기록부 기재 권한에 대한 교사의 독립성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 교사가 학부모나 외부의 압력 없이 학생의 성장과정을 온전히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대입 현장에서는 종합전형 평가 지침에 수행평가 기반 활동을 평가하는 별도 항목을 마련하고, 교과전형과 종합전형 간 지원 특성을 명확히 구분하여 안내해야 한다. 대학은 서류평가에서 수행평가 기반 기록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구조를 제도화함으로써, 과정 중심 평가의 가치를 대입에서도 실질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행평가의 분리는 과정중심평가를 대학 입시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는 최악의 퇴보가 되어버릴 것이다.
결국, 수행평가를 점수 경쟁 시스템에서 분리해 내야만 수행평가의 본질과 역할을 지킬 수 있다. 성찰, 탐색, 실패를 학습 기회로 삼는 경험은, 점수화의 압력이 제거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수행평가를 정량적 평가에서 과감히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학생부 종합전형에서 수행평가의 영향력과 의미를 극대화하는 길이다. 점수화된 수행평가는 내신 성적의 장식품에 불과하지만, 서술형으로 기록된 생활기록부는 학생의 지적 성장과 성찰적 사고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과정을 기록하고, 실패를 존중하며, 모름을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는 교육.
이 길이야말로 반지성주의를 넘어 지성의 가치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대한민국 교육의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한민국 교육은 구조적으로 교육보다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평가의 본질을 바로 세우고, 성장을 위한 교육, 지성을 위한 교육을 지켜야 한다.
반지성주의 시대에서 교육은 단순한 평가로 마무리될 것이 아니라, 지성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보루로서 기능해야 한다. 사다리는 그 다음이다.
교육이 지켜야 할 가치는, 지성 그 자체이다.
교육은 줄 세우기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진짜 교육은 성찰과 실패를 기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