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영의 구성원인가 구성요소인가
당신이 이데올로기를 가져야지, 이데올로기가 당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본 건지, 교수님이 흘린 말인지,
아니면... 내가 쓴 글을 까먹은 걸지도 모른다. 만약 이게 내 말이면 너무 멋있어서 문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문장이 내 것이기를 바라는 내 안의 지적 허영과 실랑이 중이다.
하지만 출처보다 중요한 건, 이 말이 점점 더 현실과 짙게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는 한국어로는 '사상'으로 번역된다.
사상은 개인이나 집단이 대상에 대해 규정짓는 틀이다.
넓게 보면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틀이고, 좁게는 개인이 도덕적ㆍ정치적 선택을 내리는 기준이다.
혼란한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사고의 체계를 세워야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사상(이데올로기)은 바로 그 역할을 한다.
사상이 없다면 인간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로부터 주체적인 사유를 할 수가 없다. 그 순간 인간은 고장난 나침반을 들고 항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사람은 알게모르게 자신의 사상을—서툴게나마— 각자 나름의 구조로 가지고 있다.
즉, 사상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도구이자 무기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며, 치열한 사유의 끝에서 얻게 되는 결과물이다.
정확히는 그래야만 한다.
문제는, 그 나침반이 정교해질수록 많은 사람들이 사상을 가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갇혀버린다는 점이다. 마치 나침반을 들여보며 감탄하고, 그 정밀함을 맹신하다가 코앞의 빙산에 들이박는 배처럼.
조악한 나침반은 바다를 헤메게 하지만, 정교한 나침반은 자칫하면 배를 침몰시킨다.
현실에서는 개인이 사상을 가지고, 정교화하고, 가다듬는 사례보다는, 주어진 사상에 본인을 결부하고 규정짓는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사상(이데올로기)은 사고의 결과물이 아닌 진영의 색깔로 바뀌어버린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어느 진영에 서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개인의 이성과 판단보다 집단의 소속감이 우선되고, 이데올로기는 사고를 확장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사고를 제한하는 철조망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회 문제가 등장했을 때, 그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 입장을 세우는 대신, 먼저 "내가 속한 집단은 이 사안에 대해 뭐라고 하지?"를 파악하려고 한다. 진보든 보수든, 페미니즘이든 반페미니즘이든, 특정 사안에 대한 반응은 '이념적 반사신경'처럼 자동화되어 있다. 심지어 그 집단의 사유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것을 자연스레 자신의 생각으로 둔갑시킨다. 생각하는 대신, 복사-붙여넣기를 하는 것이다. 인지부조화로 인한 불편함과 뒤늦게 따라붙는 이성의 정당화 시도는 덤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할 때가 많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동시에 생각하는 존재 아니었는가?
가장 역설적인 것은, 사상이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생겼다는 점이다. 종교든 철학이든, 모든 사상의 출발점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하고, 세상을 더 넓게 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체계화되고 집단화될 수록, 인간은 더 깊이 구속된다. 사상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고, 다름은 곧 적이 되며, 이견은 사상에 대한 배신으로 취급된다. 왜 우리는 사상을 갖고도 생각하길 포기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배척하는가.
결국, 사상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입장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 사상을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고, 스스로의 사유를 가다듬는 태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물음을 건너뛴다. 골치 아프기도 하고, 사상이 더 이상 사유의 도구가 아니라, 커뮤니티 소속이나 정치적 진영 획득의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은 사상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사상의 소유물이 되어버린다
진영 논리, 비이성, 맹목적 추종—사상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상들이다. 우리가 사상의 주체가 아닌 사상의 객체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그 착각에서 벗어날 때다. 진정한 사상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의심하고, 내가 조율하는 것이다.
사상은 우리가 가져야 한다.
당신은 사상의 소유자인가? 아니면 사상의 소유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