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내가 아니니까
"탄핵 반대 집회자들이 큰 충돌없이 조용히 해산했습니다."
나는 그 뉴스를 봤다.
누군가는 담담했고, 누군가는 아쉬워했으며,
누군가는 오열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뉴스의 댓글에는 이런 말들이 흘러넘쳤다.
"봐라, 말문 막히니까 조용히 사라지지. 저게 그들의 수준이다."
"승복도 못 하던 인간들이 이제야 조용해졌네."
이상했다.
과연 그들이 조용히 해산하지 않았다면―가령 자리를 지키거나, 항의하거나, 폭력적으로 돌변했다면―그때는 이렇게 말했을까?
"음... 아직 할 말이 남아있나보네? 한 번 들어볼까?"
"왜 결과가 나왔는데 왜 승복하지 못할까? 그에 대한 이유가 있겠군"
우리는 안다. 그럴 리 없다.
조용히 흩어지면 "비겁한 침묵"
끝까지 소리 지르면 "수치스러운 반항"
이건 불공정한 시험문제이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답을 적기도 전에 오답 처리된 문제오류니까.
판단은 행동을 보고 내린 게 아니었다.
확신을 증명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건대,
이것은 정치적 쟁점이나 서있는 진영에 대한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판단이 이성에 근거한 것인지 진영에 근거한 것인지 해체하는 것이다.
비슷한 일은 얼마 전에도 있었다.
법정에서 한 변호사가 꽤 강경한 어조로 주장을 펼쳤고, 판사와 증인은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 영상을 본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와, 변호사 말 잘하네. 상대가 할 말이 없어서 말문이 막혔잖아."
"저 무례한 변호사 봐라. 감정만 앞서고 논리는 없지. 그에 반해 차분한 판사와 증인을 봐라."
같은 장면, 같은 사람들, 같은 어조.
그런데 다르게 해석됐다. 아주 반대로.
흥미로운 건, 양쪽 모두 자신이 '논리적인 쪽'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변호사의 공격이 정당한 논리'라며 옹호했고,
누군가는 '판사와 증인의 침착함'을 칭찬했다.
이쯤 되면 묻게 된다.
사람들은 '논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는 걸까?
아니면 '입장'을 먼저 정하고, 그 다음에 거기에 논리를 끼워 맞추는 걸까?
"나는 편향 없이, 합리적으로 판단해."
하지만 그 말 자체가 이미 확신에 기반한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 위에 해석을 쌓고, 해석 위에 비난을 얹는다.
그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착각이다.
어떤 입장에 서 있든, 사람들은 항상 이성적인 쪽은 '우리'고, 감정적인 쪽은 '그들'이라고 말한다.
논리란 말은 설득의 수단이 아니라, 소속을 증명하는 언어가 되어버린다.
가장 위험한 건, 이성의 이름으로 자신의 확신을 절대화하는 태도다.
그들은 가장 논리적이길 원하지만, 정작 자기 논리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진영에 대한, 혹은 진영논리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비판은 그보다 더 깊다.
사람들이 '이성'이란 개념을 얼마나 자기 입맛에 맞게 조리해 쓰는지,
그리고 그 과정을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것이다.
논리라는 이름의 감정,
팩트라는 이름의 확신,
이성이란 이름의 진영.
그 안에서 진짜 '논리'는 점차 흐려지게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가짜 논리'가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하기 시작할 때다.
자신이 가장 이성적이라고 믿는 사람일수록, 자기 생각을 검토하지 않는다.
그게 이성을 가벼이 믿는 사람의 가장 큰 비이성이다.
하지만 그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의외로 멀지 않은 한발짝 앞에 있다.
진짜 이성은, 한 번쯤 자기 자신을 먼저 겨눈다.
자기 확신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향한 논리의 언어를 진짜 설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꺼내기까지 오래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