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

by 작은영웅

새천년 2000년도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제주도 외에는 비행기도 타본 적이 없고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던 내가 유럽을 선택한 것은 과감한 시도였다. 호텔팩으로 떠난 여행이었고 영어를 잘하는 친구와 동행했고 미리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으나 여행 내내 절실하게 느낀 것은 영어를 잘하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한쪽 팔이 없는 외국인 소녀 곁에 앉게 되었다. 가녀리고 예쁜 소녀는 팔 한쪽이 없었다. 맞은편에는 자애롭고 인자한 할머니가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친구의 통역에 따르면 멕시코 소녀로 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유럽 여행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소녀는 밝고 명랑했다. 쉴 새 없이 나에 대해 궁금해했다. 내가 들고 있는 여행 책자의 한글을 보고 글자가 아름답다고 칭찬하면서 뭔가를 내게 계속 물어보는데 대부분 알아듣기 힘들었다. 대학 졸업 후, 담을 쌓았던 영어라 더더욱 알아들을 수 없었다.

뼈저린 후회가 밀려들었다. 영어 공부 좀 할걸. 이 일뿐만 아니라 나의 30일간의 유럽 여행은 영어의 필요성을 처절하게 느끼게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가끔은 멈출 때도 있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해 온 것 같다.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영어 학습 관련 책을 늘 골라 왔고 그것을 활용해 공부를 했다.

누군가 괜찮다고 추천하면 큰돈이 들지 않는 한 도전했다. 하지만 공부하는 속도에 비해 잊어버리는 속도가 더 빨라서 내 영어 공부는 진척이 딱히 없었다.

지금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많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시원 스쿨’,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등.

지금 나열한 것은 그나마 꽤 오래 붙들고 있던 것들이다. 도대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왜 나는 원어민을 보면 한 마디도 못하는 걸까? 나 자신이 입금은 하는데 출금이 안 되는 계좌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보람이 없으니 지속할 힘이 없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 영어 공부는 늘 그만 두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렇게 지지부진해도 영어 공부를 아예 그만두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난 일 년에 서너 번은 외국 여행을 다니기 때문이다.

나갈 때마다 느끼는 자기반성, 영어 공부 다시 시작하자. 그렇게 다시 베스트셀러를 검색하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그만두고 반복되는 나의 영어 공부의 역사.


그럼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냐고. 바로 듀오링고이다. 나와는 다르게 영어를 곧잘 하는 두 딸아이가 듀오링고로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큰아이는 스페인어, 둘째는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내게도 소개해 주었다.

난 공짜라는 것에 혹해서 시작했는데 꽤 재미있다. 실력이 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속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매일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바로 듀오링고를 한다. 공부를 하는 것 같지 않고 게임을 하는 것 같다. 엄청 재미있지는 않지만 공부처럼 싫지도 않고.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는 만족감도 주고. 또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에너지가 없어지면 더 이상 공부를 안 해도 되기 때문에 죄책감 없이 공부를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내면 무제한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오늘은 이만큼만 해도 돼. 하면서 아쉬울 때 그만두게 해주는 이런 시스템이 나에겐 너무나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두 아이랑 학습 실적을 공유하는 것도 좋다. 연락이 드문 아이들과 연결이 되는 느낌도 좋다.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다.

매일 밥을 먹듯이 영어 공부를 하는 게 참 좋다. 이건 부담 없이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영어가 언제 아웃풋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욕심 없이 그냥 쌓아가고 싶다. 언젠가는 인출될 날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매사에 끈기가 없는 내가 영어에 대해서만은 그 끈을 놓지 않고 계속하는 게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와 보람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서 가능한 게 아닐까. 이렇게 영어가 일상이 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영어도 일상이 되지 않을까.

약간은 부족하지만 수줍게 한 마디씩 하는 내가 되길 바라며. 완벽한 한 마디보다 자연스럽게 어린아이처럼 한 마디씩 던지는 그런 나의 미래 모습을 기대하며, 외국 여행길에 주위 사람들과 소소한 대화 정도를 나눌 수 있는 나를 기대하며 오늘도 듀오링고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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