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속의 추억

by 작은영웅

비 내리는 토요일이다. ‘비도 오고 그래서 니 생각이 나서~’로 시작되는 노래가 들려온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내게도 있던가.

나는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어두운 하늘이 싫고,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별로다. 게다가 나는 우산과 인연이 닿지 않아서 비가 내리는데 우산은 없고 집에는 가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다. 결국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게 되고 우산은 자꾸 쌓이고, 아끼던 우산은 어쩌다 펴보면 녹이 슬어 있다.


어린 시절의 우산은 슬픈 생각부터 떠오르게 한다. 아침에는 화창했는데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려면 비가 올 때가 많았다.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엄마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엄마는 없다. 아마도 생계에 바쁘셨을 것이다. 비 내리면 학교에 마중 나오는 엄마를 가진 아이들이 참 부러웠었다. 그래서 내가 엄마가 되면 내 아이는 비 올 때 꼭 마중을 나가야지 결심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했던 나는 아이가 학교 끝날 때 직장에 있어야 했으니까.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따뜻한 엄마로 기억되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일기예보를 늘 살피고 아이의 가방에 우산을 잘 챙겨주는 것으로 대신했던 것 같다.


우산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면 시간이 흘러 대학 때로 기억된다. 기억 속의 그날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 무렵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가려고 나오니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때는 쉽게 우산을 살만한 가게도 없었다.

난감해하던 나의 머릿속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학교 근처에 집이 있다는 동아리 선배가 생각난 것이다. 사실 난 그 선배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신박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선배 집에 전화를 하자.

그리고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서 집에 못 간다고 버스정류장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하자. 아마 그 선배는 마음이 착해서 나올 것이다. 그때 선배가 나에게 호감이 있나 없나 알아볼 방법이 있다. 선배가 우산을 하나만 가지고 오면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것이고, 두 개를 가지고 나오면 그냥 후배로 생각하는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 근거 없는 생각이었지만, 난 결국 실행에 옮겼다. 전화를 했고, 선배는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몇 개를? 두 개. 하지만 선배는 하나는 들고 하나의 우산을 같이 썼다. 거리를 두고 우산을 같이 쓰느라 선배의 한쪽 어깨는 다 젖었지만 난 선배의 배려로 젖지 않았다. 그런 나머지 우산은? 버스 정류장에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집에 도착하면 쓰고 가라고. 내가 생각한 대로는 아니었지만 선배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그 선배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몰래 짝사랑하던 나는 선배의 마음을 확인하자 갑자기 선배가 부담스러워졌다. 나도 자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의 감정은 그렇게 흘러갔고 나는 가급적 선배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우산을 핑계로 불러낼 때는 언제이고, 참 선배 입장에서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리고 어린 나의 감정은 그렇게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좋은 사람을 보냈다.


그랬는데, 한때 좋아했던 감정은 미안함으로 남았는데 그 선배를 먼 후일 직장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무슨 이런 운명의 장난이.

이미 둘 다 가정을 이루었고 과거의 시간은 추억 속으로 잠긴 후였으나 미안함이 남았던 나는 선배의 도움이나 요청에 열심히 일하는 걸로 답했다. 물론 선배도 엄청 친절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사이좋게 직장에서 선후배로 잘 지내던 중 선배의 아내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선배의 아내는 우리 사이를 염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충격이었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또 할 수 없이 선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선배는 이유도 모르고 또 서운했겠지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난 또 선배를 배신했다.

갑자기 냉랭해진 나를 보며 대학시절의 나를 떠올렸겠지만 할 수 없었다. 이미 가정까지 가지고 있는 선배의 마음을 흔들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또 멀어졌다. 선배는 많은 오해와 의문을 품었겠지만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만이 내가 선배와 선배의 아내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다.


그 이후 선배의 소식을 들으면 승승장구하고 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라도 우연히 다시 만나면 지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선배는 내가 싫겠지.

인생을 살면서 마음에 앙금이 남아 있는 사람이 몇 있는데 그중의 한 명이 그 선배이다. 두 번씩이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그 선배에게만은 내가 나쁜 사람이었음을 인정한다. 우산 속에서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가 지금도 생각난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 근처의 카페에서 마신 칵테일의 이름도. ‘키스오브파이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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