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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

by 작은영웅

나는 A형이었다. 웬 과거형? 혈액형도 변하나?

어렸을 때 사용하던 수첩에는 혈액형에 따른 성격 유형이 늘 기록되어 있었다. 혈액형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색깔에 따른 성격 유형도 있었다. 요즘 MBTI 유사한 것이었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아이는 질투가 많다고 하여 당시에 노란색을 좋아했음에도 일부러 기피했던 기억도 난다. 그림을 그릴 때면 자연스레 노란색 크레용에 손이 갔는데 그때마다 안돼, 질투의 색이야 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색을 선택했던 경험들 말이다.


일단 혈액형으로 다시 가보자. 요즘에는 태어나면 바로 혈액형을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초등학교 시절 교실 앞에 나가서 귀에서 피를 뽑아 혈액형 검사를 했다. 줄을 서서 했는데 난 A형으로 판정을 받았다.

판정받은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건강기록부에 선명하게 A라고 쓰여 있었다. 그랬으니 난 당연히 A형이었고 수첩에서 맨날 그에 해당한 성격을 읽었다. 성실하고 꼼꼼하며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완벽주의적 경향이 있고 예민한 편이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원래 그랬는지 이 성격에 맞추다 그랬는지 헷갈리지만 난 조용하고 내성적이다고 확고하게 믿었고 늘 그런 아이였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너 같은 아이는 100명이어도 담임하겠다고 할 정도로 극도로 얌전했다. 사람들 앞에서 거의 말을 못 했고 말을 해도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릴 정도였다. 극 소심한 아이. 그런데 친해지면 스몰토크에서 어찌나 재잘거리며 얘기를 많이 하든지 친구들이 놀라곤 했다. 이렇게 말을 잘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수줍어하고 벙어리처럼 구냐고.

음악 수행평가 때는 집에서 아무리 연습을 해도 막상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면 모기소리만 하게 노래를 불러서 선생님께 핀잔을 들었다. 국어 시간에 일어나서 책을 잃을 때면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온몸을 덜덜 떨면 선생님이 그냥 앉으라고 할 정도였다.

정말로 얌전하고 착한 아이의 극치였다. 이런 성향은 대학생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으나 그 성향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아무튼 난 이런 극소심한 성격이 혈액형 때문에 비롯된 나의 운명이려니 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극복 의지도 없었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졌던 것 같다.


그런데 혈액형이 바뀌었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피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워낙 건강 체질이라 병원에서 피검사할 일이 없었다. 검사 결과가 나와서 들여다보니, 혈액형이 O형이었다.

그때 내 반응은 “피가 바뀐 것 같아요.”였다. 임신 중에 빈혈도 있어서 가뜩이나 피가 부족한데 피를 다시 뽑았다. 여전히 결과는 O형이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내 혈액형이 잘못된 거였다니. 난 바로 O형의 성격을 찾아보았다. 자신감이 넘치고 리더십이 강하며 의욕이 넘치고 승부욕이 강하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정이 많으며 집중력이 강하고 지배적이어서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이때부터 나의 삶은 재편되었다. 그동안 속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소심함이 늘 답답했는데 난 원래 이런 화끈한 성격이었구나. 앞으로는 제대로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했던가. 정말로 그때부터 나는 외향적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표현을 못해서 그랬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재치 있는 말솜씨와 유머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모임을 하면 중심에 있었고,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이슈몰이를 하기도 했다. 얌전하고 조용하면 존재감 없던 나는 점차 잘 놀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혈액형의 변화로 인한 것들이었다.


난 O형이어서 좋았다. 왠지 모를 자부심마저 느꼈다.

A형일 때 약간은 위축되었던 자존감하저 회복된 느낌이었다. 누가 내 뒤에서 흉을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러면 어때 나만 괜찮으면 된 거지 생각하는 당당함마저 갖게 되었다.

혈액형 하나에 이렇게나 휘둘리는 인간이라니. 그래서 나는 절대로 운세를 보지 않는다. 친구들이 심심풀이로 타로점이나 유명한 사주풀이집에 가자고 꼬셔도 절대로 가지 않는다. 내가 그들의 말에 조정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좋다고 한 말은 다 잊어버리고, 부정적인 한 마디에 꽂혀서 불안해할 것을 알기에.


이제 혈액형이 또다시 바뀔 일은 없을 것이고, 나는 평생 O형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을 정으로 포용하는 왕언니 스타일,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도 나한테 맞지 않은 옷이다.

어린 시절 너무 오래 A형으로 살아서 그런지 나는 강해 보이지만 소심하고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내성적인 성향도 무지 강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해 보이지만 집에서 조용하게 혼자 이것저것 하면서 지내는 것도 좋아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성격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가 바라는 성격으로 바꿔가려는 의지만 있다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생은 다른 형의 성격으로 살아볼까?

B형이 좋을까, AB형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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