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되었습니다

by 작은영웅

명절 기간 동안 속이 울렁거린다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꾸 춥다면서 이불을 뒤집어쓰는 딸. 좋아하는 보드게임도 안 하고 잠만 자는 딸을 보면서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습관성 위염을 달고 사는 아이라 본인은 배앓이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내가 보기엔 뭔가 느낌이 달랐다.

결혼하고 4년째, 아이는 절대 낳지 않고 선언하고 직장생활과 취미생활로 바쁘던 딸아이 었다. 시댁에서 기다리고 사위도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지만 딸아이는 단호했다. 이유는 엄마처럼 힘들게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엄마가 힘들게 자신을 키워줘서 고맙다는 얘긴지 아니면 엄마처럼 애를 키우느니 자기는 애를 낳지 않겠다는 건지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손주를 둔 주변 친구들이 육아를 돕느라 애쓰는 것을 보면 부럽기보다 다행이란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친구들은 예뻐서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했지만 그게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서둘러 귀가해 테스트를 해본 딸이 임신이라고 소식을 보내왔다. 긴가민가 했던 것이 명확한 사실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딸의 결혼을 알고 있는 지인들이 손주는 생겼냐고 물을 때마다 당당하게 우리 아이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말해왔었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도 손주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다독여 왔었다. 아직 철없는 아이처럼 소꿉놀이 하듯이 살고 있는 딸부부가 행복해 보였고 야리야리하게 생긴 딸아이가 과연 아이를 키워낼까 하는 걱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짐은 얼마 전부터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올해 세 명이나 결혼을 했고 그 친구들이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고 딸아이가 전했을 때 느낌이 딱 왔다. 이제 곧 마음이 변하겠구나.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으니. 그래서 얼마 전 사돈부부를 만나 저녁을 먹고 얘기를 나눌 때에도 손주를 기다리는 사부인에게 잠시 기다려보시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얘기를 했었다. 그러면서 혹시나 했던 가정들이 역시나가 되었다.


상황이 어찌 됐든 난 할머니가 되었다. 그럼 좋은 할머니가 되어야겠지. 엄마가 처음이라서 큰아이를 키울 때 미안한 일들을 많이 했다.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줘도 이유 없이 우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린 일, 반성할 때까지 나오지 마라며 방에 홀로 둔 일, 직장 생활한다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종일 유치원에 맡긴 일 등등. 당시 아이는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육아서를 보면서 범한 실수였다. 엄한 교육 탓으로 큰아이는 반듯한 모범생으로 자랐지만 우리 모녀는 흔한 스킨십도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잘해준 것은 기억나지 않고 잘못해 준 것은 늘 마음에 사무친다. 엄마가 잔정을 주지 않아 외로움을 많이 타던 아이가 다정한 남자를 만나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을 보며 늘 사위에게 고마웠었다. 나와 사이가 가까워진 건 아니지만 결혼하고 나서 딸과 나 사이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면은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임신을 한 것이다. 순간 딸과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할머니가 되어줌으로써 좋은 엄마까지 되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무얼 해야 할까 일단 우선적인 것은 물질 공세다. 손주 탄생과 관련한 아이템 구입에 적극 후원해야겠지. 그럼 돈을 모아야겠다. 다음은 아이 양육을 적극 도와야지. 나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는 주말에라도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아이 엄마에게 휴식의 시간을 주어야겠다. 언제든 딸의 하소연을 늘 들어주고 필요로 하면 언제든 달려갈 것이다. 이런 모든 수고의 대가는 딸과 손주의 미소겠지.


주변 친구들을 보면 남편을 버리고 주중에 손주를 키우다가 주말에만 집에 오는 이도 있고, 날마다 손주를 보기 위해 출근하는 이도 있고, 아예 딸 집 근처로 이사한 이도 있다. 만나면 손목에 보호대를 하고 다니는 것은 기본이다. 잘난 딸을 둔 대가라면서 나름 행복하게 손주를 키우는 친구들을 보며 난 저렇게까지는 안 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는데 막상 닥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딸이 재택을 주로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양육과 어느 정도의 병행이 가능할 것 같지만 모든 것이 걱정스럽다. 하지만 손주의 탄생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계가 기대된다. 아무런 책임감이 없어서 존재 자체로 사랑스럽다는 손주를 나도 품에 안아보게 되었다. 지금 딸아이는 엄마 눈으로 보면 못 미덥고 불안하지만 내가 그랬듯이 딸부부는 자신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일단 나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손주를 품에 안게 될 그날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내게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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