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걷는 길

by 작은영웅

매일 걷게 되는 길이 있다. 아파트 사이에 십자 모양으로 난 길은 차가 다니지 않아 한가하게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오랫동안 웃자란 나무가 지붕처럼 드리워져 터널을 만들어서 여름에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고 양쪽 가장자리에 화단에서는 계절별로 야생화들이 피어나서 운치를 더해준다. 가끔은 주위 학교들의 미술 작품이나 시화 작품이 전시되기도 한다. 게다가 길 양쪽으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가 많아 요즘 길에서 보기 힘든 귀여운 아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특별히 바쁘지 않으면 이 길을 걷는다. 날씨가 좋을 때는 출근 시간에도 여유롭게 나와 이 길을 걸어 전철역으로 간다. 퇴근 시간에는 엄청 피곤하지 않으면 천천히 이 길을 걸어서 집으로 온다.

이 길의 입구에는 내가 좋아하는 팥죽집이 있다. 점심 때는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인데 이곳에는 팥칼국수가 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이 음식을 나는 마음이 허기질 때 먹고 싶어 한다. 마음이 허해지고 기운이 빠질 때 진한 팥 국물에 설탕을 듬뿍 넣어 따뜻한 국물을 먹고 나면 수혈을 받은 사람인양 기운이 솟는다. 통통한 면발을 좋아하지 않아 대부분의 건더기는 덜어내고 사발 가득한 팥 국물을 쉼 없이 먹는다. 그 자체가 힐링이다.


이렇게 원기를 회복하고 그 길에 들어선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족,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킥보드를 타는 사람,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 심지어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까지. 이 길에선 사람들이 사는 풍경이 있다. 길에서 사람들은 조금은 천천히 걷고, 웃고 이야기하고 인사를 건넨다. 그들 속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보인다. 전철 속에서 만나는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무뚝뚝한 얼굴들, 질주하는 자동차 속에 숨겨진 사람들이 아닌, 살아 숨 쉬고, 떠들고, 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속에 걷다 보면, 그래, 세상은 이런 곳이지,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지,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발그레한 얼굴로 엄마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군것질 거리를 먹으려 길을 걷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보면 우리 아이들의 어린 날이 떠오르고, 비속어 섞인 말을 주고받으며 걸어가는 한 무리의 중학생들을 보면 귀엽고, 유모차를 끌고 가는 할머니를 보면 우리 아이들을 길러준 엄마가 생각난다. 그들의 대화도 정겹다.

“이 떡꼬치 너무 맛있어. 매일매일 먹어도 좋아. 근데 엄마는 못 먹게 해.”

“야 새끼야, 너 너무 못 생겼어.” “거울이나 보고 말해라 새끼야.”

“우리, 손주 배고픈가 보네. 집에 빨리 가서 밥 먹자.”


이런 소리들을 들으며 길을 걷다 보면 좌판을 깔고 온갖 물건들을 파는 할머니들의 무리가 보인다. 그들이 앞에 늘어놓은 것들은 집에서 직접 만들어 나온 김치, 죽, 반찬, 두부 등과 농수산물 시장에서 가져왔을 법한 야채들, 과일들이다. 나는 가끔 야채류를 구입하는데 늘 너무 많이 담아 준다. 식구가 적은 나는 많이 주는 것이 반갑지 않지만 할머니의 마음이니 받기로 한다. 그 옆에는 공산품을 사는 사람들도 가끔 나오는 데 공장에서 직접 가지고 나온 것이라 저렴하다. 난 모자나 특이한 모양의 신발들을 즉흥적으로 구입하곤 한다. 몇 번 착용하지 않고 예쁜 쓰레기로 전락하기 쉽지만 쇼핑의 즐거움이 있으니까.


여기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수다스러운 할머니와 조용한 할아버지가 만들어 파는 붕어빵집이 나온다. 가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등장하셔서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리를 지키면서 붕어빵을 판다. 할머니가 어찌나 말이 많으신지 침이 붕어빵에 가득 튈 것 같은 불안감이 드는 곳이지만 붕어빵 속에 맛있는 팥소가 가득 들어 있어서 난 좀처럼 지나치질 못하고 붕어빵을 사 온다. 배가 불러서 당장 먹지 못하고 냉동실에 들어가게 될지라도 구수한 빵구워지는 냄새는 언제나 나를 유혹한다.


여기를 지나 이 길의 끝에 이르면 트럭에서 닭을 구워 파는 아저씨가 있다. 곱사등이인 아저씨는 오랜 기간 성실하게 이곳에서 장사를 하신다. 아마도 단속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나타나신다. 트럭 뒷칸에서 지글지글 기름을 빼며 익어 가는 먹음직스러운 통닭을 지나치기는 쉽지 않다. 요즘은 목살도 이런 방법으로 익혀서 파는데 이걸 상추에 싸 먹으면 별미다.

결국, 길에 끝에 다다른 나는 바리바리 산 물건들로 양손 가득 검은 봉투를 들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지갑에 현금이 없이 산다는데 나는 이 길에서 해야 하는 쇼핑 때문에 늘 현금을 들고 다닌다. 가끔 계좌이체를 하는 때도 있지만 천 원, 오천 원, 만원을 두루 가지고 다닌다. 할머니들은 잔돈이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만원이면 양손 가득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이곳을 지나쳐 귀가하는 즐거움을 느끼려면 현금이 필요하다.


도시 한가운데, 그것도 시청 앞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소소하면서도 인간다운 풍경 속에서 나는 걷는다. 이런 모습이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있는 동안은 누리면서 살고 싶다. 그게 클릭만 하면 박스채 배달 되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팔 아프게 과일을 사들고 집에 오는 이유이다. 그래서 오늘도 바구니에 담긴 과일을 고르고 상추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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