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초기 시댁과 친정이 멀었던 시절, 추석과 설은 내게 공포의 시간이었다. 일단 20시간이 넘게 걸리는 귀성길은 극기 훈련과도 같았다. 걸어가는 게 빠를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 화장실 줄이 너무 길어 엄두가 안 나던 휴게실. 너무 급해서 고속도로 옆 산으로 올라간 적도 있었다.
그것도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해볼 만했으나 아이들이 감당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중간에 숙소에서 1박을 하면서 내려가는 것이었다. 주로 애용하던 곳은 자연휴양림이나 시설 좋은 찜질방이었다. 초창기에는 휴양림을 자주 갔으나 점차 예약이 어려워져서 대형 사우나를 찾게 되었다. 고속도로 인접한 곳에 시설 좋은 대형 찜질방이 유행처럼 생기던 시절이라서 여러모로 좋았다. 아이들은 휴양림보다 찜질방을 좋아했다. 할머니집에 간다고 하면 찜질방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곤 했다. 온갖 먹을 것이 많고 다양한 테마가 있어서 좋아했으리라. 나도 시댁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춰지는 게 좋아서 그런 시간이 즐거웠다. 길이 막혀서 중간에 자고 간다고 하면 다들 안쓰러워했으니까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그렇게 의무감으로 숙제를 해치우듯이 내려가기를 30년, 시댁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이제 귀성 행렬에서 벗어났다. 이제 명절 전날까지 근교에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쉬다가 명절날 근처에 있는 친정집에 간다. 딸이 많은 친정은 명절날부터 축제 분위기이다. 결혼한 딸과 사위도 외할머니집에서 놀다가 집에 간다. 그러니 나는 명절이라고 해도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고 맘 편히 놀기만 한다.
이제 명절은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가족이 모이면 무엇을 먹을지,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하고 놀지만 고민하면 된다. 추석 전날까지는 여행을 하면서 지낸다. 온갖 가을꽃잔치가 곳곳에서 개최되니 갈 곳이 널려있다. 남쪽만 피하면 된다. 수도권 북쪽으로 어디든지 출발한다. 심지어 고속도로 통행료도 무료이니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드디어 추석날 아침, 간단한 아침식사와 운동을 마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친정집에 간다. 명절 음식으로 가득 찬 점심을 먹고 나면 시댁을 다녀온 동생들이 도착하고 우리 딸내외도 온다. 선물 꾸러미를 풀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맛있는 안주와 음주를 곁들인다.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이 지겨워지면 보드게임이 시작된다. 어린 조카부터 50대 어른들까지 격의 없이 어울리기에 딱 좋은 것이 보드게임이다. 다섯 가지 보드게임을 종류를 바꿔가며 몰입한다. 가끔 영화를 볼 때도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 두 시간 남짓 영화만 보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보는 거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밤이 깊어지면 미리 봐둔 노천 술집으로 이동한다. 청량한 가을 공기 속에서 분위기 있는 술집에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이렇게 먹다가 놀다가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다음 날은 야외활동이다. 아침을 먹고 한 시간 이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많이 걸을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명절 내내 부른 배를 소화시킬 수 있다면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구경하고 차 마시고 가벼운 한 끼 식사를 하고 돌아오면 나름 보람 있는 하루가 완성된다.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종일 집에만 있으면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정 안되면 동네 탐방이라도 한다. 동네 공원을 산책하거나 뒷산에 올라가 보기도 한다. 명절 휴가를 살만 찌는 시간으로 보내면 후회만 남기 때문이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면 엄마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이 동나기 시작한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언제 만나도 편안한 사람들과 이별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안도감이 든다. 즐거웠지만 같이 부대끼는 시간들이 힘든 부분도 있으니까. 이렇게 기다리던 명절이 지나가면 다음 명절을 기다리게 된다, 가족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긴긴 휴가가 최고의 매력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휴가 기간이 나를 설레게 한다. 명절 연휴는 이제 내게 꿀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