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

by 작은영웅

올해는 눈을 보기 힘들다. 따뜻한 날씨 때문인지 자꾸 비만 내린다. 겨울비는 차갑다. 하지만 눈은 포근하다. 겨울이니까 눈이 좀 오면 좋겠다.


눈은 낭만을 떠오르게 한다. 첫눈은 첫사랑, 순수함 이런 것과 닮아 있다. 처음 눈이 내렸을 때 온 세상을 덮은 그 하얀 색의 이미지 때문인 것 같다. 끝이 어쩔망정 처음의 그 지고지순한 깨끗함은 그 무엇도 비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미지는 그토록 아름답고 깨끗하지만 눈의 마지막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시작이 빛난 만큼 끝은 오히려 더 비참하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남쪽 지방은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었다. 나중에 사회 시간에 배운 지식에 따르면 찬기운이 차령 산맥에 막혀서 눈으로 내린다고 했던가. 아무튼 아침에 일어나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을 만날 때가 많았고, 눈이 내리면 날씨가 포근했고 함박눈이 소복이 내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눈을 떠올렸을 때, 춥다 라는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따뜻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침이면 그렇게 예쁘던 눈 쌓인 풍경은 정오가 될 무렵이면 녹아내리고 밟혀서 처참한 이미지로 변했다. 거리를 걸으면 질척거리고 더러워진 눈의 모습이 지저분했다.

비는 내리는 동안은 별로이지만 비가 내린 후의 거리가 말끔하고 청량해 지는데 반해 눈은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그 뒷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내리는 순간은 좋았지만 질척이는 눈 때문에 운동화가 다 젖을 때는 눈이 싫어졌다.


결혼을 하고 북쪽 지방에 살게 되었을 때부터 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내가 살던 북쪽 지방도 눈이 곧잘 내리곤 했는데 차가운 칼바람과 함께 내리는 눈은 우산이 없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얼굴을 아리게 했다.

하늘에서 소복하게 내리는 눈이 아니라 바람과 함께 옆에서 들이치는 눈이었다. 게다가 눈이 내리고 나면 길에 쌓인 눈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투명해 보이는 곳조차 얼음이 되어서 눈이 내린 후 며칠은 조심해서 걸어다니지 않으면 엉덩방아를 찧기가 십상이었다.

추운 날씨가 지속되면 그늘진 곳은 일주일 이상 빙판이어서 조심조심 걸어다녀야 했다. 그러니 눈이 내리면 일단 다음 날 일어날 교통 체증, 빙판 때문에 걱정부터 앞서니 낭만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나중에 일어날 많은 나쁜 일들에도 불구하고 눈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낭만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처음 만나는 순간의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그 모든 고통을 상쇄할 만큼 지고지순한 아름다움, 소리없이 소복하게 쌓이는 순백의 어여쁨은 누구든 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와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 눈이 내리면 사랑하는 이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밖에 눈이 내린다고, 당신도 이 아름다운 모습을 같이 봤으면 좋겠다고 애정어린 마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눈을 봐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그만두게 된 것 같다. 눈이 또 오는구나, 내일은 출근 걱정을 해야겠구나, 나가서 눈길을 걸어볼까, 아니야 춥긴만 할거야, 그냥 창문으로 봐도 되지 뭐. 하면서 더러운 유리창을 열지도 않고 얼룩얼룩한 창문을 통해 조금 지켜보다 마는 것이다.

흑백사진 같은 느낌의 눈이 그려낸 그림보다 알록달록한 화려한 색감에 더 눈이 가기 때문에 겨울에서 화려하게 꾸며진 크리스마스 장식물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인지 화이트크리스마스 운운하면서 설레이던 젊은 날의 감성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오늘 아침은 눈을 떠 보니 눈이 소복하게 쌓인 화이트크리스마스였다. 밤새 눈이 내렸나 보구나, 차로 가야할 곳은 낮에 움직여야겠구나. 딱 이정도의 생각을 했다. 점심 무렵 거리에 나서니 날씨가 풀려서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 파란 하늘이 오히려 무척 반가웠다.

근심 걱정을 유발하는 특별한 이벤트 같은 눈의 낭만보다 별일 없는 평화로움이 좋은 나이가 된 것이다. ‘오늘도 별일 없는 하루’가 안심되고 더 좋은 그런 나이인 것이다.


올겨울에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이는 작은 마을 숙소에서 아침을 맞이해 보고 싶다. 종일 털장화를 신고 눈 속을 거닐며 배가 고파지면 따뜻한 국물이나 호빵으로 몸을 녹이다가 또 걷고 걸으면서 하루를 지내보고 싶다.

눈과 나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 순수의 아름다움에 맘껏 취해보는 하루가 내게 주어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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