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의 여행

by 작은영웅

남편은 늘 휴가를 내기 어려웠다. 장기휴가는 물론이고 하루 연가조차도 쉽지 않아 했다.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더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 연유로 나는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친구들과 많이 다니게 되었다. 주말에 당일치기나 일박 정도의 여행은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지만 장기 여행은 불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에 지치거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는 나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나를 집에서 탈출만 시켜준다면.


그렇게 살다 보니 나에게는 여행친구가 많이 생겼다.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스타일에 맞는 사람들이 있고, 같이 다니면 힘든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칠 수도 없는 노릇. 모임의 특성에 맞게 여행지를 조정한다. 국내여행이 맞는 사람들, 해외여행이 맞는 사람들, 소그룹으로 다니면 좋은 사람들 등등.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는 여행 가이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제일 관심이 많고, 경험도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나의 역할이 탐탁지 않을 때도 있지만 다 짜주는 판을 따라가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국내 여행은 일정을 내가 짜서 진행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일행들의 반응에 신경이 쓰여서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다. 일행이 불평을 하면 나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고생해서 일정 짜고 진행하는데 보람은커녕 불평까지 들어야 하는 현실이 짜증 나지만 굳어진 나의 역할을 벗어나긴 힘들다.


어제 모임에서 또 일을 벌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멤버가 6명이다. 취향이야 모두 다르겠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가짐이 중요할 것이다. 말로 표현은 안 해도 미묘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워하는 것들은 느껴지기 마련이다.

남을 만족시키기보다 나 자신을 위한 여행이어야 하는데 왠지 가이드로 일하러 가는 느낌이기도 하다. 이런 나의 성향을 일로 발전시켜 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 정도의 의욕은 없다. 난 단지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하고 싶을 뿐.

그래서 사람들과 만났을 때, 여행에 대한 얘기는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 괜히 꺼냈다가 내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제도 이렇게 시작됐다.

1월이면 제주도가 동백꽃으로 덮인대.”(나)

“그럼, 가자. 여행 일정 짜서 진행해 봐.”(친구 1)

“항공권, 숙소, 렌터카, 이런 건 우리가 잘 못하니까 네가 해. 우리는 돈만 낼게.”(친구 2)

“그래, 네가 여행 많이 다녀서 그런 거 잘하잖아. 기대된다.”(친구 3)

이런 식으로 나는 무보수 여행업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정말로 친구들 만났을 때 어디가 좋다더라, 어디에 가고 싶다 이런 말은 절대 안 하려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난 이제 편한 사람들과 편하게 여행 다니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도 “1월 제주도는 따뜻하고 꽃이 만발한대요.”에서 출발했으니 내가 할 말이 없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번거로운 여행 일정은 그만할 생각이다. 최소한 내가 나서서 바람을 넣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모임에 가서도 여행에 대한 얘기는 안 할 것이다.

현재 나는 가족과 함께하거나 혼자 조용히 사색하면서 사진 찍고 다니는 여행도 좋다. 어울려 다니면서 줄 서서 사진 찍고 밤새 다음날 기억도 안나는 수다를 떠는 것들이 조금은 나를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설렘은 없다. 일정을 짜느라 영상으로 미리 본 여행지 풍경, 후기를 통해서 먹어본 듯한 음식, 이런 것들에 신경을 쓰다 보니 새로울 것도 없고 확인차 가는 느낌이다.

기대감과 설렘이 없는 여행이라니. 프로젝트를 수행하러 가는 느낌의 여행이라니. 이제 이런 여행은 그만해야겠다. 앞으로 국내여행은 가족과 함께 가는 것으로.

해외여행은 아직 패키지에 의존하는 실정이기 때문에 친구들과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앞으로 해외여행은 친구들과 함께, 국내 여행은 가족들과 함께로 당분간 콘셉트를 잡아야겠다.


올해 제주는 동백꽃 개화가 늦다고 한다. 1월에 제주도를 가면 만발한 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여행 콘셉트는 어디까지나 꽃구경이다. 이제 불평은 그만하고 기대감을 올려봐야겠다.

어쨌든 여행은 즐거워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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