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작은영웅

아침밥을 먹는 도중 갑자기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 읽어 봤어?”

“아니, 책은 안 읽고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만 봤어.”

“친구랑 독서토론 하기로 한 책이라서. 재미있어?”

“재미있게 봤던 것 같아. 아직도 몇몇 장면은 선명하게 떠올라.”


무려 35년 전에 본 영화인데도 선명한 장면과 주인공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꽤 인상적인 영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얼굴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바람기를 잠재우지 못하는 남주를 향한 분노들이 지금도 되살아 난다.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결말은 알지만 세세한 스토리는 다시 보면 느낌이 다를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당시에 있었던 하나의 해프닝 때문이다.


당시 나는 사회 초년생으로 아침에 출근하면 커피를 20잔씩 나르는 상큼하고 귀여운 신입이었다. 지금이야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는 그게 당연시되었고 나도 나름 보람을 느끼는 일이었다. 커피를 탈 때 프림을 필요 이상으로 넣으면 다들 맛있다고 칭찬해 주셨다.

당시 그런 나를 무척 예뻐하던 상사 한 분이 계셨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글을 쓰는 분이셨다. 나중에 본인이 쓰던 구닥다리 타이핑 기계를 나에게 증정해 주시기도 한 분이셨다.

그분이 월요일 아침 열심히 커피를 타서 가져온 나에게 주말에 뭐 하고 지냈는지 물으셨다. 나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좋은 영화지요. 영화는 어땠어요?”

“좆나게 재미있었어요.”


순간 그분의 표정이 묘해졌다. 뭔가 잘못 말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자리를 떴다. 단어 사용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에 어디선가 들은 말을 썼는데 아무래도 단어 사용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당장 인터넷 검색이라도 하겠지만 그 뜻을 명확하게 알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신입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다. 하지만 영화 한 편이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의 사무실 분위기, 그곳에 있던 사람들, 젊고 순수했던 나의 모습이 스쳐간다.


어쨌든 나에게 ‘프라하의 봄’은 그런 기억과 함께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영화다.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은 것은 많지 않다.

일단 흑백 영화 중에 고르자면 나중에 로마를 방문하게 된 이유가 되었던 ‘로마의 휴일’, 가슴 아픈 짝사랑에 가슴 아팠던 ‘노트르담의 꼽추’, 광기 어린 사람에 두려움을 느꼈던 ‘폭풍의 언덕’이 떠오른다.

영화를 스토리 위주로 보는 편이라 기억 속에 이미지가 남아 있는 영화는 나름 나에게 영향을 끼친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미장센이나 분위기 보다 스토리를 중시 여기다 보니, 이미 본 영화를 또 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결말을 이미 아는 영화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책에도 고전이 있듯이 영화에도 고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아울러서 공감과 울림을 주는 영화가 그럴 것이다. 다시 봐도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영화, 배우들의 어색한 톤과 말투를 상쇄할 만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가 그럴 것이다. 최근에 영화관에 잘 가지 않는다. 일단 2시간 가까이 집중하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고, 나를 몰입시킬 만큼 영화가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서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 게 맘도 편하고 영화 보는 도중에 오락가락할 수 있어서 좋다. 이것도 집중력 하고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요즘 영화관에서 오래된 영화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던데 이제 그런 것들을 찾아보고 싶다.

넷플릭스에는 없는 영화, 제목은 기억나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 영화, 좋았던 기억은 있는데 지금 다시 보면 어떨지 궁금해지는 영화를 다시 보면 좋을 것 같다.

영화관에서 그런 영화들을 감상하다 보면 오래 전의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영화를 보고 감동하고 눈물지었던 젊은 날의 나를 만나는 즐거움도 같이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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