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옷을 입기 전의 나

소그룹 상담을 시작했습니다(1)

by 샤인포레스트
아래의 내용은 ‘엄마성장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원더라이팅 소그룹 상담을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8번의 상담 과정을 준비하고 성장하며 글을 작성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 글쓰기 주제는 ‘엄마가 되기 전의 나’였다. 이제는 한 몸이 되어버린, 언제부턴가 나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어버린 ‘엄마’라는 그 옷을 잠시 벗어두고 진짜 나의 속살을 만나는 것이 이번 글쓰기 상담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 우연 같지 않은 이 여정을 통해 그동안 헤매고 헤매었던 ‘자아 찾기’의 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착한 딸 그리고 착한 누나

몇 해 전 명상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한 적이 있었다. 명상 가이드를 따라 빛이 비치는 숲길을 따라 걷고 걷다가 도착한 평온한 장소에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는 어린 7살의 내가 앉아있었다. 아이를 불러 보았다. 뒤돌아본 아이는 담담했다. 아이답지 않았다. 슬퍼 보이기 까진 아니었지만 아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애어른이었다.


어릴 적 앨범을 들춰보다 4-5살 때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당돌하게 바둑독을 놓고 있는 내 사진을 보았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저 땐 진짜 당돌하고 자기 할 말 따박따박했다고. 나는 언제부터 어른스럽다는 얘기를 들었던 걸까. 아마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였던 것 같다. 6살 아이가 4살 남동생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다녔던 이야기, 동생을 그렇게 챙겼다는 이야기. 나는 6살 그때부터 내 안의 어린아이를 묻어두었나 보다. 그리고 어른인 척 괜찮은 척 진짜 어른이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았나 보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렇게까지 어른스러워져야만 했을까. 어릴 땐 착하다는 얘기가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의젓하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으쓱하기도 했던 것 같다. 더 착하고 의젓하기 위해 애썼다. 4학년이던 나는 집에서 오이를 썰고 마요네즈를 짜서 샌드위치를 만들고는 놀이터에 있던 1학년 동생을 불러 먹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썼을까…


불안했나 보다. 두려웠나 보다. 엄마가 너무너무 힘들어서 도망가버릴까 봐. 나라도 너무 힘든 엄마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금이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엄마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날까 봐.


#불안한 유년기

항상 위태로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지금의 내가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뿌리가 심겨 있었던 건 그 불안한 가정상황 와중에서도 엄마가 최대한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태도로 나와 동생을 대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상황은 항상 위태했고, 엄마는 고군분투하셨다. 아빠는 애는 쓰셨지만 잘 풀리 않았고 오히려 빚만 늘어갔다. 결국은 돈이 항상 문제였다. 동생도 사춘기가 되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다. 위태로웠다. 나라도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항상 알아서 잘하는 착한 딸이었고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다. 마음속에 뭔가 꿈틀대는 게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적당히 좀 놀다 내 중심을 찾았다.


#새로운 변화 1-청춘의 20대

엄마가 한 번씩 사주를 보러 가서 내 사주를 넣었을 때 꼭 듣는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얜 딱 선생 할 팔자라고. 몇 년에 한 번씩 그런 소리를 들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내가 다른 무엇을 잘하는지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꽤 성적도 잘 나오는 편이었다. 갑자기 어렵게 수능이 나오긴 했지만 내 성적은 크게 변동이 없었다. 그 덕에 드디어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았지만 두 분의 관계, 그 편안하지 않은 분위기, 돈문제에서 떠나고 싶었다.

신나게 대학교를 다녔고, 다행히 그 당시 갑자기 쪼그라든 티오를 뚫고 어렵사리 그 지역에 합격하게 되었다. 신나게 일했고 아이들을 만났고 여행을 다녔다. 춤을 배우러 다니면서 공연도 하고 다양한 사람도 만나면서 세상 재밌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의 경제상황은 어려웠고 내가 버는 적은 월급은 때론 아빠의 재정적 구멍, 때론 엄마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들어갔다. 혼자 고군분투하며 서울로 올라간 동생에게도 내 적은 월급과 성과급이 홀라당 다 들어갈 때도 있었다. 여전히 나는 집의 중심이었고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서로의 갈등이 있을 때 나는 여전히 중재자였다.


#새로운 변화 2-결혼

내가 속한 틀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맘껏 누리고 싶었다. 항상 세계를 여행하고 싶었던 나의 욕구를 그나마 해소하기 위해 직장에서 보내주는 6개월 해외연수도 다녀오고, 2년간의 대학원 파견도 다녀왔다. 매년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틀 안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다 어느덧 30대가 되었고 나도 결혼을 할 시기에 대한 무언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는 참 대화가 잘 통했고, 같이 있을 때 너무 즐거웠다. 지금 현재 이룬 것은 없지만 앞으로가 기대되는 남자였기에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닮았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는 진짜 나의 모습에 대해 한 번씩 고민하게 되었다. 평생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아왔는데, 결혼을 하고 같이 살다 보니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적 갈등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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