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운명
내가 살사를 처음 만난 건 스물네 살 때였다.
동호회 라이프.
말만 들어도 왠지 신이 났다. 진짜 어른이 되어 어른들끼리 만나 취미생활을 하는 그런 상상이 실현되는 일이었으니까.
‘다음’ 창을 열고 검색창에 '라틴댄스 동호회'를 쳤다. 후두두둑, 몇 개의 결과가 튀어나왔다.
카페 안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살폈다.
음.. 사람은 많은데 왠지 연령대가 다 좀 있어 보였다. 여긴 아닌 것 같아.
그러다 살사 동호회가 눈에 들어왔다. 라틴댄스 동호회보다 훨씬 동호회 개수도 많고 활발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내가 꼽았던 곳은 아카데미 형식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도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 일단 저기 가서 배워보자.
두근두근, 설레는 첫 번째 수업.
난관은 따로 있었다.
닉네임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잠시 멈췄다. 뭘로 하지.
이럴 때 기발한 생각이 팡하고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에잇 모르겠다. 뭐 별거 있겠어.
대학 때 언니들이 이름을 살짝 바꿔 부르던 '수분'! 그걸로 하자(지금 생각하면 세상 촌스러운..)
그때는 몰랐다. 그 이름을 15년 넘게 쓰게 될 줄은.
원, 투, 쓰리. 파이브, 식스, 세븐.
기본 스텝에 맞춰 발을 밟기 시작했다. 사이드 스텝, 포워드, 백워드.
살사 음악이 흘렀다. 격정적이면서도 멜로딕 한 그 소리가 귀를 타고 쑥 들어왔다. 몸이 자꾸 음악 쪽으로 기울었다.
이거, 생각보다 좋은데.
"수분님! 정모 꼭 나오세요!"
아리따운 강사 선생님이 신신당부하셨다. 그래야 실력이 훅 는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지. 가보지 뭐.
금요일 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정모 장소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우와.
신세계였다.
평소라면 내가 절대 입지 않을 것 같은 옷을 멋들어지게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리 초급반 여자 강사 선생님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세상에나.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환한 미소를 머금고 남자 파트너와 춤을 추는데, 같이 추는 남자들 표정이 사르륵 녹는 것 같았다.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수분님, 3일 뒤에 호텔에서 큰 파티가 있어요. 혹시 가볼 생각 있으세요?"
어릴 적 생일파티다운 파티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가. 호텔 댄스파티라고?
에라, 모르겠다.
두둥.
문을 여는 순간, 진풍경이 펼쳐졌다.
https://youtu.be/YXnjy5YlDwk?si=A_Q-GbMGJGGh2zPe
200여 명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심장이 같이 움직일 만큼 큰 소리로 살사 음악이 쏟아졌다. 춤을 배운 지 겨우 3일째인 내가 여기 서 있다니. 간도 크지.
손을 내미는 분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춤 배운 지 3일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하하."
그랬더니 함께 춰주시는 *살세로들이 세상 친절하게 리드해 주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기본 스텝만 겨우 아는 사람인데, 리드에 이끌리다 보니 내가 뭘 추고 있는 건지 모를 동작들이 몸에서 나오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동작들이. 몸이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춤을 잘 추는 분과 출수록 더 그랬다. 마치 꼭두각시가 된 것 같았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 났다. 음악에 맞춰 내 몸으로 뭔가를 표현한다는 일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9시 즈음에 시작한 파티는 12시경이 되어가자 더욱 열기를 더해갔다. 나중에 춤을 제법 추면서 알게 되었지만 파티는 12시 즈음부터가 찐이라는 것.
그런데 갑자기 뚝.
음악이 멈췄다. 키가 큰 남자분이 가운데에 섰다. 살사와는 다른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줄을 맞춰 서더니 막 소리를 질렀다. 이건 또 무슨 광경이야.
라틴 베이스의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90도씩 방향을 바꿔가며 춤을 췄다. 다 같이, 같은 동작을, 같은 방향을 보며. 춤추는 사람들 표정이 하나같이 어찌나 신나 보이던지.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확 올라왔다.
‘나 저기 들어가야겠어.’
그게 시작이었다.
동호회 라이프의 진짜 시작.
나는 그날부터 살사와 라인댄스를 함께 추는 동호회에 난생 처음 발을 담갔다.
*살사를 추는 남성을 살세로, 여성을 살세라라고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