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 나는 다시 살아났다
아이가 딸깍 잠들었다.
숨소리가 깊어지고, 작은 뒤척임마저 멈추는 그 순간.
나는 잠들지 않기 위해 무거운 눈꺼풀을 이겨내려 가까스로 애를 썼다.
허물처럼 이불을 그대로 둔 채 조용히 빠져나와 소리 없이 방문을 닫았다.
그리곤 거울 앞에 섰다.
눈에 아이섀도를 사악 바르고
립스틱을 발랐다.
입고 있던 티 한쪽을 위로 올려 묶었다.
이제 곧 시작될 밤외출을 위해.
나는 아이를 재우고 살사를 췄다.
그때의 난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친정엄마는 언제든 나가라고 하셨지만
친정아버지는 어두운 밤에 두 아이의 엄마가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썩 내켜하지 않으셨다.
물론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살고 싶었다.
아니 살아야만 했다.
아무리 침을 삼키고 삼켜도 목구멍을 밀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조용한 밤거리.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그 문 앞에 섰다.
문을 여는 그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https://youtu.be/gxlB1B9emDc?si=HL6nDDHJ54yJYhqj
낮게 울리는 콩가와 또박또박 리듬을 찍어내는 클라베,
그 사이를 빠르게 채우는 봉고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음악이 시작되면 몸이 움직이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마음 깊은 곳을 먼저 깨우는 그 리듬이 나는 참 좋았다.
“한 곡 하실래요?”
상대가 손을 내민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세계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리듬에 귀를 기울인다.
원, 투. 파이브, 식스.
바닥 위 보이지 않는 각자의 선 위에서 스텝을 밟는다.
그리고 음악 속 리듬에 맞춰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묘한 텐션.
약간의 힘, 아주 작은 각도만 틀어져도 몸이 알아차리고 다음 동작으로 답한다.
서로 말할 필요도 없다.
은근한 미소와 그저 손 끝의 느낌을 통해 둘만 아는 암호를 주고받을 뿐이다.
콩가가 둥둥 울리고 봉고가 빠르게 리듬을 쪼개기 시작하면 발이 먼저 반응한다.
음악을 따라 몸이 흘러간다. 딴생각을 할 겨를은 없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리드와 음악의 박자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나는 몰입한다.
간주가 시작되면 노래가 잠시 멈추고 리듬 악기들의 연주가 시작된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는다.
마치 작은 무대에 둘만 남은 것처럼 각자의 움직임을 작은 무대 위에서 펼친다.
(살사에서는 이 순간을 '샤인'이라 부른다)
음악을 타고 각자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발을 움직인다.
하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공존하는 공간 안에서 서로의 움직임을 보며 같은 리듬 위에서 춤을 이어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상대가 다시 손을 내민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 흐르듯 부드럽게 다시 함께 춤을 춘다.
음악이 절정을 향해가고 상대가 나의 등을 휘감고 함께 중심을 잡으며 돈다.
그가 손을 올려 만든 공간 사이로 나는 지나가고 한 바퀴 두 바퀴를 돈다.
음악이 멈추면 우리의 무대도 끝이 난다.
미소로 서로 인사하고 다음 무대의 주인공을 찾아간다.
한 곡이 끝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마음껏 음악에 취해 춤을 추고 더 이상은 못 추겠다는 결심이 설 때
비로소 비밀의 문을 열고 현실세계로 다시 나간다.
쏴아아-. 순간 시원하고 거센 바람이 내 얼굴을 씻어낸다.
방금 전까지 어깨 위에 매달려있던 돌덩이들이 풍선이 팡팡하고 터져 사라지는 것 같다.
나는 그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벌써 이곳이 다시 그립다.
사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은밀한 이 외출이 훗날 무너질 것 같던 나를 붙잡아 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