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성에 관하여,

by 함주원

상황과 우연에 부정성과 긍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저 해석의 여부에 달려있으며

해석은 마음과 세계관에 따른 것으로서,

대개 많은 경우 사회적 이념과 경향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즉, 긍정적인 상황이나 부정적인 상황,

긍정적인 우연이나 부정적인 우연은 없다.


대개 부정적이라 평가되는 상황이나 긍정적이라 불려지는 우연만 있을 뿐이며

이는 진리가 아닌 경향성에 불과하다.


경향성은 진리가 되지 못한다.

경향성은 때때로 진실된 마음을 가린다.


진실을 외면한 거짓된 경향성은 자신의 삶을 오염되게 만들며,

그 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희극과 비극을 마주하게 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나의 삶으로 보인 사회적 삶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삶의 진실성이란 이토록 복잡하며 단순하다.


이는 때때로 습관적이며 관습적이고,

연극적이며 동시에 실제적이다.


따라서 부정을 긍정으로 바라본다는 것,

긍정을 부정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그저 삶이고,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고 해석하거나 느낄 뿐이다.


같은 경험과 환경이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반응을 각자마다 보이는 이유가 이와 같다.


누군가에게 슬픔이 누군가에게는 무심한 일로,

누군가에게 기쁨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으로 가닿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경향성이 아닌 진실성이다.


자기 자신에게 얼마만큼 진실한가 가 결국

부정과 긍정, 우연에 대한 명료한 해석을 만들어낸다.


‘나다움’이라는 현시대적 해석이 때때로

과도하게 도식화되어 있다 생각될 때가 많다.


‘당신이 무조건 옳다’, ‘당신은 이미 완전하다’와 같은

일종의 슬로건스러운 이야기들과 공감들은 때때로

그 자체로 거짓되며 과도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어서

도리어 인간 개인의 진실성을 가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다움’이라는 것은

사회가 말하는 어떠한 형태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나다움’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의 무조건적인 옳음을 뜻할 수도 없다.


인간 개인 안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틀림과 모순, 삐뚤어진 욕망과 뒤틀린 사고들,

각자가 깊게 숨겨둔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에게 꺼내 보이고, 그것을 진실하게 마주하는 것.


이것이 ‘나다움’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존재에게 ‘당신이 무조건 옳다’는 말은

한 인간의 무오성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이며

‘완전함’이라는 거대한 개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영역으로 축소되고 변형된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슬로건적 공감,

되풀이되는 사회적 자동응답은,

그리고 교육되고 학습되어야만 하는

이와 같은 말들은 때때로 한 개인의 눈을 가리게 한다.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어렵고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나를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틀림없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 타인이 말해주는 나를 듣는 것은 쉽다.

그것은 나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필터링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맘에 들면 듣고 아니면 흘리면 된다.


여기에는 ‘나 자신’도 없고 ‘진실성’도 없다.

피동적이며 수동적인 이러한 행태는

나로 하여금 그 어떤 진실도 마주할 수 없게 한다.


좋은 말은 의미가 없고

나쁜 말은 무익하다.


거기에는 진실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말을 하는 화자 역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한 개인이 대상의 진실성을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언이라는 것은 늘 양날의 검과 같다.

그것을 마음을 베어 진실을 꺼내기도 하고

동시에 마음을 난도질해 진실을 감추기도 한다.


그러나 조언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점은

조언하는 그 누구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조언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일까?


조언은 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리고 조언을 해석하는 것은

듣는 이의 몫이다.


여기에는 부정도, 긍정도 없다.

이는 그저 해석의 여부에 달려있으며

해석은 마음과 세계관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진실한 진실성이 매우 크게 요구된다.


조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난도질당하는지, 진실을 꺼내게 되었는지

분간하거나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들은 대부분 감정이라는 마취제를 맞았으며

감정적 격동, 혹은 감정적 변화,

혹은 감정적 신선도에 따라

해석이 매번 과도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관성도 객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도한 경우 논리성은 완벽히 배제되고

순간의 기분에 따라 논리라 불리는

문장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렇게 다시 한번

한 개인은 진실성을 상실하고

부정과 긍정의 늪에 빠져

한탄하거나 기뻐하게 된다.


한 인간은 완벽한 진실함을 가질 수 없다.

한 개인은 자기 자신에 늘 진실할 수도 없다.

인간 안에 무수히 많은 다른 인간이 있어서,

우린 스스로를 속이고, 때론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완벽함이란, 인간 세상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함이란, 인류 역사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 개인은 그저, 경향성과 방향성을 가진 채로

주어진, 혹은 우연히 맞이한 하루를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삶은 그저 다가왔고, 우리는 그것을 마주한다.

작은 것이라 여겨진 것부터 큰 것이라 여겨지는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다가온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그저 삶인 것이다.


우린 그것을 해석한다.

태어나 인격이 형성되고, 스스로 사고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늘 해석하고, 분류하고, 판단하고, 인정한다.

늘 완전하지 못하고 완벽하지 못한 상태로.


이러한 삶을 마주하는 인간은

두 가지의 선택 앞에 놓이게 된다.

조금 더 나은 삶, 조금 더 좋은 삶을 추구하거나

조금 더 분명한 나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것


조금 더 나은 삶은 상대적이다.

조금 더 좋은 삶은 계급적이다.

그래서 거기엔 늘 불행이 껴있다.

내가 완벽할 수 없고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분명한 나로서 살아가는 삶에는

완전한 행복이나 완벽한 세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늘 행복하다거나 늘 즐겁거나 하지도 않는다.

다만, 최소한 내가 나로, 분명한 나로 살아갈 수는 있게 된다.


내 삶을 내가 결정하게 된다.

선택의 문제 앞에 내가 스스로 고민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까지의 모든 순간들을

내가 살아가며, 내가 느끼며, 내가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무조건 좋은 삶이라고,

이것이 무조건 더 나은 삶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저 진실성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역시 도식화되고, 계급 지어지는 형태의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선택의 문제며 때로는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삶은 여전히 삶이고

거기에 부정과 긍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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