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은 썩는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by Joung park

갓 졸업을 하고 사회에 야심찬 발걸음을 내디디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내 전매특허 이야기가 있다. 바로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And after that?)" 이라는 옛날 로마에 작은 대학 정문 입구에 새겨진 글귀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이 간판에는 감동 덩어리의 사연이 담겨져 있다. 법대를 다니는 한 가난한 고학생이 청운의 꿈을 품고 공부를 하고자 했지만 가난해서 도저히 학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사방팔방 뛰어다니다 마침내 로마에 사는 어느 유명한 귀족 부인에게 한 번 도움을 청해 보라는 말을 듣는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그는 귀족 부인을 찾아가 자신이 법률 공부를 마치도록 도움을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이 부인은 쉽게 청년의 뜻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번 학기부터 장학금을 드릴 테니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십시오.”


부인의 배려에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정중히 인사하고 집을 나오려는데 부인이 갑자기 다시 이 청년을 불렀다. “젊은이, 잠깐만 이리로 오세요. 그 장학금을 가지고 가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먼저 이번 학기부터 등록해서 공부를 시작해야겠지요.” 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그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시험에 합격하여 제 꿈이었던 훌륭한 법률가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그리고 결혼을 해서 큰 집을 장만하겠지요”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더 큰 집을 가져서 행복하게 살겠지요”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지금까지 당당했던 그 젊은이의 얼굴에 당황스럽고 황당한 모습이 선하게 드러나기 시작을 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죽겠지요” 하는 그 젊은이는 자신이 없는지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청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깊은 상념에 잠겨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한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할머니는 아주 분명하고 엄숙한 어조로 그다음 말을 이어갔다 "인생의 마지막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투자할 수 없소" 그 할머니와의 만남이 청년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로 하여금 그렇게 처절하고 적나라하게 인생의 핵심을 꿰뚫고 관통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자신의 잠자는 심연을 후벼판 질문 앞에서 그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이라는 할머니의 질문을 반면교사로 삼아 매 순간 마치 오래 자리 잡았던 습관처럼 자기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그 할머니는 청년에게 돈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었던 인생의 큰 깨달음을 선물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법대생은 변호사로 성공하였고, 훗날 대학교 총장이 되어 학교 정문에 그 옛날에 할머니가 던진 질문인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이라는 경구를 새기게 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에게 할머니의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이라는 질문을 말하면서 나 자신이 청년들에게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들은 왜 대학 졸업식을 ‘Graduation’이라고 부르지 않고 ‘Commencement’라고 하는지 알고 있나요?’ 다들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그동학교 그리고 대학 그리고 대학원들을 졸업했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표정을 보인다. 간단한 배경의 설명을 한다. ‘commencement’라는 단어는 ‘commence’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인데 그 의미는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무슨 말인가? 졸업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의 한 장(chapter)을 마치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다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라는 뜻이다.


인생에서 접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은 그때에는 길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은 금방 지나버렸고 또다시 새로운 인생의 단계와 과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어느 시작과 끝은 대나무 마디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다. 대나무의 마디는 끝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간 고생한 모든 일들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것이지만 단지 또 하나의 시작을 예고할 뿐임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절대로 한순간에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고 또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권면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작은 모판에 심겨진 모와도 같다. 모판은 잠시 동안 머무는 것일 뿐이다. 좀 있으면 논이라는 넓은 곳에 심겨질 때까지만이다.


이 할머니의 잠언 ‘그리고 그다음에는요?’이라는 질문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한 청년의 ‘인간승리’ 이야기가 펜데믹 이후 메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메릴랜드 주 보위에 사는 레한 스테이턴이라는 흑인 청년은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플라시틱 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으로는 그 처절함과 비참함을 담아낼 수가 없어 보인다. 차라리 새로운 신조어 ‘똥수저’ 가 그의 삶을 더 정확하게 투영하는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난 레한은 8살 때 어머니가 자신과 형을 버리고 떠나면서부터 불행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돈을 벌어야 하는 레한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힘들고 위험한 쓰레기 수거일이었다. 그의 하루는 그렇게 남들이 깊은 잠에 빠졌던 새벽 4시부터 시작을 했었다. 그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눈여겨본 사장 아들의 추천 덕에 레한은 보위 주립대학 (미국 대학 순위 149등) 에서 메릴랜드 대학을 거쳐 쓰레기 수거 일을 하면서 LSAT(미국 법대 입학시험)을 거쳐 올해 하버드는 물론 컬럼비아, 펜실베이니아 등 유명 법대에 모두 합격했다.


좀 나가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낙하산’ 또 ‘아빠 찬스’ ‘엄마 찬스’라는 단어들과는 먼 한 흑인 젊은이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쓰레기 수거 일을 하면서 최고의 대학 하버드 법대를 입학하는 경이로운 삶의 역사의 비결이 무엇인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담담하게 답을 했다. "쓰레기 수집일을 했던 그 시간이 내 평생 가장 힘들었지만 다 지나가는 단계 (passing rites) 라고 생각했다. 어둠도 기쁨도 다 한 찰나일 뿐이다. 잘 견디면 그다음이 있다. 내가 하버드 법대를 입학했다고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Life is a never ending journey and challenge. 단지 오늘은 또 다른 시작인 것뿐이다.” 그 나이 또래의 친구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절도, 마약, 총기 사고에 연루되어서 감옥에 있다고 한다. 그는 벌써 놀라운 삶의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 혼자 힘으로 나만큼 성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 하면서 가슴을 치고 포효를 해도 누구 하나 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단지 인생은 끊임없는 그다음과의 경쟁일 뿐이라고 한다. 너무나 황당하게 들리는 겸손이고 열정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벌써 워싱턴 D.C.의 유명 정치컨설팅회사에서 꽤나 괜찮은 연봉과 포지션으로 일하자는 손길을 펼친다. ‘이만하면 됐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래도 그는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고 한다. 도대체가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당돌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아이러니의 극치라고 해아할 것 같다. ‘쓰레기 수거원’과는 극명하게 다른 길을 간 흑인 젊은이의 이야기도 있다. 예일대 출신으로 LA 한인 타운 지역에서 노숙자 (홈리스) 로 살고 있는 숀 플레전츠가 주인공이다.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난 그는 공군 장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밑에서 참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수석 졸업생인 그는 예일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의 학력과 경력만 보면 현재 노숙자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플레전츠가 노숙자로 빠진 원인은 사업 실패와 마약중독이라고 한다. 그는 말한다. 그가 너무 빨리 성공한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다고 한다.


인생의 정상에서 그는 ‘이제 나는 다 이루웠다’라는 안주 병, 교만 병이라는 고질 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댔고 삶은 노숙으로 전락했고 지금 그는 각종 생활집기를 모은 작은 텐트 안에서 비좁게 생활한다. 그는 동성 배우자와 10년 전 결혼해 9년째 거리에서 살고 있다. ‘자신이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그가 한 답이다. 항상 자신의 어머니가 생전에 어릴 적부터 귀가 따갑도록 한 말 ‘it is just a beginning and just another day. So keep on going.” 왠지 이 말이 내 귀에는 ‘너무 한순간의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항상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을 명심하라는 권면으로 들린다. “그랬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 턴데…”라는 노숙자의 길을 가는 한 젊은이의 탄식이 내 귀를 후벼판다.


쓰레기 수집원에서 하버드 법대까지 간 레한 스테이턴 그리고 예일대에서 노숙자까지 간 숀 플레전츠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전광석처럼 내 뇌리를 스쳐가는 말이 있다. 클링거의 말처럼, ‘인간의 뇌는 목적 없는 삶을 견딜 수 없다. (the human brain cannot sustain purposeless living)’ 같은 맥락에서 옛 어른들의 말씀에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가 있다. 그렇다. 시냇물은 흘러 강물이 되고,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갑니다. 시냇물이 흐르지 못하면 그것은 늪이 되어 버립니다. 어떤 이가 말함대로 "인생이란 성취가 아니라 추구입니다." 세계적인 유명한 화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런 말을 남겼다. "쇠는 쓰지 않으면 녹이 씁니다. 물은 고이면 본래의 깨끗함을 상실하며 썩어 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태만은 우리 마음의 활기를 빼앗아갑니다." 또 칭기즈칸은 이렇게 말했다. "성을 짓는 자는 망할 것이오, 길을 닦는 자는 흥할 것이다." 둘,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닫힌 사회는 망하고 열린 사회만이 흥하고 그 흥을 영원히 이어 갈 수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이다. 가진 것만 지킬려고 하다가는 언젠가는 망하고 나날이 변화하는 삶속에서 그 변화를 수용하고 보다 나은 길을 향해 끊임없이 질주해야만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진리를 그 옛날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또 우리는 왜 모를까?


“그리고 그다음에는요?”는 가슴에 담아야 할 잠언이다. 당신의 일생을 통해 뭔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부디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본성을 끊어내야 한다. 편안함과 게으름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망가뜨린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습관을 키우자.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라는 질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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