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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감사. 축복

by Joung park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영화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쉰들러 리스트"가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에는 유대인 레오폴드 페이지라는 한 사람의 ‘일등공신’ 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않다. 레오폴드 페이지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 바로 직전에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운영하는 무기 공장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페이지는 전쟁이 끝난 뒤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는 또 하나의 천운을 거머쥐게 된다.


하필이면 그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미국의 영화의 중심지 할리우드 근처에 있는 비버리힐즈였다. 그는 그곳에서 가죽 상점을 운영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영화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인연의 끈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의 상점을 찾는 절친한 고객들에게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생명의 은인 쉰들러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다.


이런 것을 '지성이면 감천이라'라고 했던가! 1980년 호주의 최고 작가 토마스 카넬리라는 사람이 페이지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마침내 1982년 세상에 출간된 소설 <쉰들러 리스트>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세월이 지나면 다 처음의 빛이 바래지는 것이다. 세상의 망각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소설 <쉰들러리스트>를 다시 구사일생 시킨 것은 다름 아니라 역시나 였었던 레오폴드의 집념과 열정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귀재로 소문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쉰들러 리스트" 를 영화로 만들면 아카데미상을 탈 거라며 매주 전화통에 매달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던가! 페이지의 끈질긴 설득에 감동을 받은 스필버그는 마침내 그것을 영화화 하기로 결심했다. 세계 영화의 한 획을 긋게 된 영화 "쉰들러 리스트" 가 마침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2001년 3월 14일 미국의 세계적 케이블 방송인 CNN은 전대미문의 케이스로 한 평범한 유태인의 죽음을 긴급 뉴스로 전 세계에 알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전날 87세의 나이로 로스엔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 유대인 레이폴드 페이지의 서거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왜 그의 삶이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 것이 마침 세상의 인지상정처럼 자리매김을 하는 서글픈 시대에 자신이 받았던 은혜를 평생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 한 사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뉴스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사람의 감사한 마음이 세상을 바꾼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진정한 뉴스임을 세상에 선포한 것이다.


요즘 ‘미국이라는 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게 만드는 숫자가 있다. 미국인 10명 중 9명은 "나라가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여론 조사 숫자이다. 물론 ‘3 중고’ ‘4 중고 또 ‘5 중고’ 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회자되는 이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애환과 고통을 십분 이해를 한다. 그러나 매를 맞을 각오로 감히 드리는 말씀이지만 아직도 나는 이 미국이라는 땅이 그런대로 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가만히 보니 나만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싶다. 매일 뉴스를 보면 생명을 걸고 어떻게 해서든 이 땅으로 넘어 올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정작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거저 시쿤등 하기만 한데 이게 웬일인가?


가끔은 미국 사람들이 국경지대의 매일의 아수라장과 북새통을 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가질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순식간에 ‘절대로 이해를 못 할 것이다’라는 절망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은가?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일평생 단 한 번도 그토록 목숨을 담보로 이 땅으로 온 적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처음처럼’이라는 말을 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언제부터 모든 것을 너무 모든 것을 ‘당연시’ 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끔은 우리의 마음이 너무 황량해지고, 맹숭맹숭해지고, 또 냉랭해지면 나는 이 땅에서 먼저 걸어간 우리의 선배들은 어떻게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또 살아남아서 오늘의 강대국을 초석을 깔았을까 질문해 본다. 그것이 알고 싶을 때에 나에게 그것이 되어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반면교사가 된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들에게 ‘What a Wonderful World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라는 노래를 선물한 참 고마운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이다.


무엇보다 이 가사와 노래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먼저 이 노래를 부른 루이스 암스트롱이라는 가수의 삶을 알아야 한다. 암스트롱 그는 차라리 혹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상을 초월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항상 창녀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바빴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루이 암스트롱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극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바로 자신의 몸을 파는 매춘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고육지책으로 빈민촌에서 살던 그는 이전부터 잘 곳, 먹을 것, 그리고 밴드가 있는 소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었고 그러다 의붓아버지의 권총을 들고 거리로 나와 신나게 방아쇠를 당겼고 그 때문에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루이 암스트롱이 부르는 ‘What a wonderful world’는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닌 루이 암스트롱이 불렀기 때문에 그 가사들이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1980년 생면부지의 미국에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 남부의 한 슬럼가 (빈민촌) 였다. 미국의 흑인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사실 몇 개 되지 않음을 그때에 보았다. 왜 흑인 아이들 대부분이 마약과 범죄에 노출되고 흑인 남성의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 밖에 안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다. 내가 목격한 이들이 사는 환경은 저의 상상력 이상으로 열악했었다. 지금도 그러한데 루이스가 태어나던 시절은 오죽했을까?


지금 그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암스트롱이 우리에게 ‘What A Wonderful World?’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흙수저 중에 흙수저인 루이스 암스트롱이 금수저 중에 금수저인 우리에게 우리가 왜 행복할 수 없느냐고 질타하는 것 같기만 하다. 지금 나라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불평하는 우리에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그는 외치고 있는 것 같다. 가끔은 자신의 노래를 듣는 우리들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번 손가락으로 세워보라고 보라고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그가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아름답게 감사하게 살고 있는데…..라고 우리에게 그의 전매특허 눈웃음을 주는 것 같다.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노래를 가장 인상깊게 만난 곳이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영화 '굿모닝 베트남'이다. 이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영화를 보다가 소름이 살짝 돋는 부분이 있다. 바로 사이공에 있는 공군 방송국에 라디오DJ로 새로 부임한 로빈 윌리엄스가 암스트롱의 노래를 틀어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 스크린에서는 노래와는 딴판으로 잔인하기만 한 전쟁의 참상들의 장면들이 나온다. 관객들의 귀에 들리는 암스트롱의 노래 가사와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반대되는 영상과 노래 가사가 절묘한 접촉점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뜻밖의 놀라운 힘이 결과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영화의 감독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말인가? "What A Wonderful World"를 통해서 전쟁의 비참함을 은유적으로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은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을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쟁에서 죽어 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통하여 너무나 덤덤해지고 당연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훗날 우리들은 '굿모닝 베트남' 에서 세상을 위로하던 그 유명한 희극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자신의 대저택에서 자살로 삶을 끝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항상 웃음과 짠한 눈물을 주었던 명배우이지만, 정작 본인은 극심한 우울증으로 외로움을 겪었고 나중에는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돼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안타까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자살을 할 마땅한 후보자를 찾는다면 금수저의 로빈 윌리엄스가 아니라 차라리 빈민층에서 잔뼈가 굵은 루이스 암스트롱이 아닐까 싶다.


루이스와 로빈 윌리엄스의 극명하게 다른 생애를 보면서 불현듯 스쳐가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내가 누리는 크고 작은 축복을 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다 내가 잘나서 내가 똑똑해서 누리는 것이다. 그 속에는 생명의 은인조차도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다. 공허함과 허무함만이 자리매김을 하고 만다. 루이스가 우리에게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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