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감, 사명감
오늘따라 부모들이 왜 자식들 앞에서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라는 나이 듦에서 오는 넋두리와 타령을 했는지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농’으로 하는 "시간은 20대에는 20마일, 30대에는 30마일, 40대에는 40마일, 50대에는 50마일 그리고 70 대에는 70마일로 달린다"라는 말이 정말 실감 나는 명언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내 나이가 68세가 되었고 나는 지금 68마일로 달리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그렇게 달갑지 않은 경험 즉 노안을 체험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20대 (20 마일), 40대 (40 마일) 와는 달리 68마일로 달리다 보면 운전대에서 바라보는 사물들을 보고 느끼는 '감'이 달라진다. 바로 나이가 들면서 원근 조절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점차 사물이 뿌옇게 보여 시력저하를 신호탄으로 골칫거리들이 생기기 시작을 한다. 마치 글을 읽을 때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뿌옇게 보이며 초점이 흐려서 멀찌감치 떨어뜨려야 글씨가 보이는 현상처럼 운전대에서 사물의 원근 조절력이 감소하여 가까운 게 잘 안 보이는 일종의 노화 현상이 내가 겪는 첫 번째 도전이 되고 만다. 매일의 일상의 삶에서 요즘따라 부쩍 전에는 멀리 보였던 것들과 느껴졌던 것들이 이제는 내 귀에 속삭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게 들렸던 글들이 이제는 나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 요즘은 무엇을 올바르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본다는 말은 바로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망원경과 또 복잡 미묘하고 미세한 국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의 합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높은 하늘의 별만을 쳐다보며 연구하는 천문학자가 발밑의 우물을 살피지 못해 빠지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발밑의 이해에만 급급해서 미로를 헤쳐 나오지 못한 채 아등바등 거리다가 끝내 갈 길을 잃고 마는 세상이 바로 작금의 세상이 아닌가? 전에는 망원경으로 적당히 대충 지나가도 무방할 깨달음의 말씀들이 내 인생에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현미경으로 대처해야 할 사례가 되는 것들이 잦아지면서 말씀을 들을 때에 이제는 갑자기 내 심장이 덜컥 내려감을 느낀다.
현미경으로 내 가슴을 휘저으면서 말씀들을 듣다 보니 '시한부' 인생은 반드시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들만의 인생무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임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자신의 겉모습을 위하여 어떤 옷차림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육체의 시간을 천상의 영원한 시간으로 바꾸어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너무 동분서주하지 말자라고 다짐을 한다. 너무 정신없이 엄벙덤벙 살다가 인생을 마친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생각해 봅니다.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 보기 시작하니 갑자기 내 시야가 어지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조급해지기 시작을 한다. 갑자기 나는 과연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이룩했는가? 스스로 따지고 질문하기 시작을 한다. 그리고 내 손가락으로 세다 보면 한없는 자괴감이 엄습한다. 내 나이에 남들은 다 저 앞에 가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질문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26년 넘게 목회를 했는데 아직도 개척교회의 그 숫자를 맴돌고 있고 그 많은 시간을 허락하셨는데 오늘 하나님께서 셈을 하자고 하시면 나는 뭐라고 변명을 또 핑계를 대야 할까 주눅이 든다. 문득 나만의 세상인 화장실로 가서 아침 세수를 하면서 갑자기 문득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왜 저 거울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는데 오늘따라 내 주름이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다.
역시나 68마일로 달리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구나 싶다. 이럴 때에 생각하는 선인 이옥의 글이다. 아마도 그도 어느날 흐릿한 거울을 달아놓고 보았다는데 그 속에 든 자신의 나이 드는 모습을 꿰나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 다른 사람들은 다 아직 팽팽한 것 같은데 왜 자네, 아니 나만 이리 쪼그라들었단 말인가?” 거울 속의 사람이 심장 정조준 저격할 기세로 인정사정없이 이옥을 몰아붙인다. “그대의 어린 시절에는 기생이 던진 꽃들이 다발을 이루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거리의 구경꾼이 나귀를 막아섰으며, 겨우 삼십을 넘어서는 과거 합격자의 반열에서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진실로 오래 머물러 주는 것이 아니며, 명예란 진실로 오랫동안 가질 수 없는 것이니, 일찍 쇠락하여 변하는 것이 진실로 정해진 이치인데 그대 어찌 절절히 그것을 의심하며, 또 어찌 우울히 그것을 슬퍼한단 말인가? 그대가 만약 묻고 싶다면 조물주에게 물어보게나.”
세면대에서 안개가 잔뜩 끼인 거울을 만지작거리다 점점 깨끗해진 거울 속에서 나의 얼굴을 보면서 문득 섬광처럼 깨달음의 순간이 옴을 느낀다. "하나님 저는 주신 달란트를 너무 낭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되나요?"라는 하소연에 하나님께서 답을 하신다. "잘 듣거라! 나는 한 번도 너에게 최고를 요구한 적이 없단다. 단지 최선을 요구했을 뿐이야." 그리고 곧바로 내 잠자는 영혼을 깨워놓는 죽비소리가 청정하게 울려 퍼졌다. "아들아! 이 세상에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은 하나도 없어 단지 사소하고 하찮은 사람들만이 있단다." 정말이지 그 말씀 하나로 나는 완전 무장해제를 하고 말았다. 내가 서 있는 땅에서 이렇게 편하게 허리를 펴본 적이 언제였든가?
요즘따라 사도 요한이라는 인물의 발자취에 관심이 많이 간다. 왜 내가 지금에 와서 사도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까? 사도 요한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에서도 나타나지만 열정, 욕망과 야망을 가진 제자였다. 훗날 천국에서 예수님의 오른 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한의 요청에서도 그의 욕망과 야망이 짐작이 간다. 그런데 그런 요한에게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당신의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맡겼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다른 제자들은 다 큰 사명을 감당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그 경쟁심이 강한 사도 요한의 귀에 이런 말들이 들리곤 했겠지요. "다들 오지에서 순교하는데 왜 저 요한만은 편하게 노인 베이비시터만 하고 있지?"라는 핀잔과 비웃음의 소리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어진 '하찮은'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언제부터 이 말을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단지 하찮은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해석한다. 그날 이후로 나의 생각이 달라졌다. 당연히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을 했다. 길가에 놓여있던 보잘것없고 너무나 하찮아서 마구잡이로 이러 저리 발로 차고 짓밟아도 되는 것 같았던 돌멩이조차도 물속에 놓이면 작은 물고기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디 그뿐인가요? 비탈길에 방치되어 있는 작은 나무토막도 그곳에 정차해 놓은 자동차가 길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버팀목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교향악단을 구성하는 악기 가운데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같은 화려한 악기만 중요한 게 아니다. 굵은 철사로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의 트라이앵글도 매우 중요하더라. 게다가 이제는 아이들도 거들떠보지 않는 1원짜리, 5원짜리, 10원짜리, 50원짜리 동전이 그렇게 귀하게 보였던 적도 없었다. 정말이지 세상에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더라. 1원짜리 5원짜리 동전도 계산대에서 가격을 지불할 경우, 매우 요긴하게 쓰일 수 있더라.
오늘 고속도로를 ‘68마일’로 달리다 문득 “아니 벌써 내 나이가?”라는 넋두리를 하다가 나로 하여금 차 핸들을 꼭 붙잡게 하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얼마 전 한국의 나로호 인공위성의 발사의 발목 잡았던 작은 고무링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무링은 로켓 최하단과 발사대를 연결하는 부위에서 연료나 헬륨을 주입할 때 기체가 새는 것을 밀봉하기 위해 사용되는 여러 실(seal)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니까 우주선을 구성하는 10만여 개의 부품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고무 링 하나가 로켓 발사를 막은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공교롭게도 이 고무 링은 1986년 일어난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대폭발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너무 사소하고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큰 위안을 운전을 하면서 받아 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왠지 오늘따라 고속도로에서 날아가는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