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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시' 와 '1 시' 중 당신의 현주소는?

변화, 새로운 패러다임

by Joung park

헬라어로 “때”(time)를 가리키는 단어 두 개가 있는데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코로노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의 개념이라면 카이로스는 비록 찰나일지라도 한 사람의 구체적 사건 속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자면 누구나 다 사람은 다 하루에 24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공평하게 동일하게 주어진 그 객관적인 시간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하여 자신의 운명을 가르기도 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인 17세 때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난 것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터닝 포인트 (전환점)이었다고 회고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통령을 2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을 만났지만. 그날 이후로 소년 클린턴에게 가장 큰 변화가 온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주어진 시간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였다. 더 이상 입버릇처럼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었다"라는 신세타령에서 벗어나 인생을 걸 만한 화끈하고 야무지고 당찬 목표와 사명감, 비전을 수립한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하듯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의 삶을 견인하기 시작을 한 것이다. 클린턴은 우리들에게 확성기로 외치고 있다. 산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처럼 살아야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이 땅에서 겨우 33년이라는 짧은 그리고 3년의 짧은 공생애였지만 그분은 전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몽땅 받친 그래서 진정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천명할 수 있었던 위대한 삶을 사셨다. 그분의 삶은 단 일 초도 목적, 의미 그리고 가치가 없이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카이로스적인 삶의 끝판왕이었다. 반대로 구약성경에서 가장 오래 장수한 사람인 므두셀라라는 사람은 무려 969 세를 살았지만 의미와 가치라는 삶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게 살았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마시고 잘 즐기다가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코로노스적인 삶의 끝판왕이었다. 그러니 부디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를 두고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고 어떤 새로운 생각과 패러다임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를 자랑하면 어떻까?


나 자신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사이에서 황금 같았던 내 젊음의 시간을 허송세월 할 때에 '순간의 선택'을 강요했던 고전이 있었다. 바로 루마니아의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의 소설 '25 시'였다. 한마디로 '25 시'는 루마니아의 한 평범한 농부 모리츠라는 사람의 기가 막히고 기구하기 이를 데 없는 역사에 철저히 짓밟히고 찢겨지고 하염없이 유린당한 인생유전이다. 왜 하필이면 게오르규는 자신의 소설을 '25시'라 했을까? 도대체 '25시'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소설에는 무슨 이유로 제목을 '25시'로 지었는지 암시하는 부분이 나온다. "25시는 인류의 모든 구원이 끝나버린 시간이라는 뜻이야. 설사 메시아가 다시 강림한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시간인 거지. 최후의 시간도 아닌, 최후에서 이미 한 시간이 더 지난 시간이지. 서구 사회가 처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25시야."


평범한 농부 모리츠는 그렇게 구원조차 기대할 수 없는 '25시'를 살아야 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신조차 대답해 줄 수 없는 절망과 고난의 시간을 그는 살았던 것이다. 24시간이 지나가면 희망의 날인 새로운 1시가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약소국가 루마니아에는 24시가 지나도 새로운 1시가 오지 않고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 계속되는 25시로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게오르규는 <25시>를 통하여 “왜 나에게는 1시가 오지 않는가? 구원의 시간이 오지 않는가? 왜 카이로스, 즉 하나님의 시간이 오지 않는가? 내 인생은 24시에서 구원의 시간인 1시로 가지 않고, 왜 25시로 가는가? 크로노스,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는가?” 절규합니다.


언젠가 소설 '25 시'를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만났다. 그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농부 요한 모리츠 (앤소니 퀸 역활) 가 전범 재판에서 영문도 모르고 오랜 세월을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석방되어 기차역에서 마중 나온 가족과 재회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마중 나온 아내는 러시아군 병사에게 강간당하여 원치 않는 셋째 아이를 낳아 데리고 마중을 나왔는데 전혀 자기를 닮지 않고 유난히도 밝은 금발 머리를 한 아이였습니다. 취재를 나온 사진 기자들이 가족사진을 찍으면서 한번 밝게 웃어 보라는 주문에 요한 모리츠 (앤소니 퀸) 은 웃으라고 하는데 미소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얼굴 모습이 클로즈업 되면서 끝나는 인상 깊은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앤소니 퀸의 미소의 얼굴도 아니고 우는 얼굴도 아닌 그저 어정쩡한 얼굴 표정이 왜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까? 이제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아마도 내 삶 그리고 수많은 이민자들의 삶의 현주소가 웃을 수도 또 울 수도 없는 그냥 어정쩡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혹시라도 2023 년을 살고 있는 우리가 1949 년 '25시' 의 농부 모리츠의 절규 “왜 나에게는 새로운 날인 카이로스적인 1시가 오지 않는가? 왜 내 인생은 24시에서 구원의 시간인 1시로 가지 않고, 왜 어제의 절망과 불안의 연장선인 25시로 가고 있는가?"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나요?


참으로 송구스럽고, 죄송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고, 황당스럽고 또 당황스러운 장면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의 모습과 1949 년 농부 모리츠의 그 웃기도 또 울지도 못한 그 어정쩡한 얼굴 표정이 오버랩을 할 때이다. 이민 1세로서 절망과 불안의 선상에서 어정쩡한 모습을 가지는 것은 견디어 낼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에게 한없는 실망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들은 다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새로운 땅에서 아메리칸드림을 꾸면서 새로운 삶을 살리라 믿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자녀들은 절망과 불안의 연장선인 '25시' 가 아니라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그런 '1 시'의 삶을 살리라 믿었다.


여기에서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은 단순히 막연히 연명하는 그런 크로노스적인 삶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 그리고 꿈과 비전을 가지는 카이로스적인 삶을 뜻함을 강조하고 싶다. 그 고난과 역경의 순간 동안 우리를 겨우 이만큼이나 지탱하게 한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누릴 미래의 새로운 '1시'였다. 몸이 으스러지고, 부서지고, 또 뭉개져도 우리 자녀들이 새 땅에서 누릴 새로운 '1시'를 상상하면서 우리들은 위로를 받으면서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들의 자녀들이 여전히 우리들처럼 '25 시' 연장선에서 아등바등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건 아닌데’라는 자괴감과 좌절감이 우리를 몹시나 당혹하게 한다.


오늘의 젊은이들의 세상을 'N포 세대' 혹은 'N무 세대'라고 칭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우리들의 자녀들이 청년으로 또 젊은이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무척이나 고단한 일인 모양이다. 취업부터 연애, 결혼, 출산, 주거까지 캄캄한 터널이니 포기하는 것이다. 또 말 그대로 무관심, 무감각, 무감동, 무의미, 무가치, 무능력, 무기력, 무책임의 하소연이 늘어만 간다. 정말이지 어떤 현자의 '우리시대의 역설'이라는 외침은 '25 시'의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녀들을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더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수명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한마디로 '25시'에 살고 요즘의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희망과 소망의 시대를 살 수가 있을까? 나는 그에 대한 답의 단서를 소설 '25시'에서 찾았다. '25시'의 주인공 요한 모리츠와 소설 지망생 트라이얀 코르가가 한 수용소 안에서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느 날 한밤중에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트라이얀 코르가가 뜬금없이 요한 모리츠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내 안경을 맡아주겠는가” “당신은 안경이 없으면 전혀 보질 못하는데 왜 내게 안경을 맡아달라고 하느냐?”라고 요한 모리츠가 묻게 된다.


트라이얀 코르가의 허공을 향한 응시가 이어지고 침울한 ‘멍 떼리기’ 가 이어지고 마침내 의미심장한 말이 터져 나온다.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내 안경으로 보아야 할 것은 모두 보아왔는데,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보기가 싫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모리츠를 ‘동공 지진’으로 몰고 간 것은 물론이다. “앞으로 안경을 쓴다 해도 절망밖에는 볼 수가 없음으로 더 이상 안경이 필요없다”라는 풍자적인 비유였었다. 이 풍자의 이야기가 오늘따라 더 절실하고 처절하게 내 가슴에 와닿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대화가 있고 난 그다음 날 트라이얀 코르가는 목숨을 끊고 말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제가 지금 이렇게 갑자기 안경 이야기를 들먹이는 것은 시골 농부 모리츠가 그토록 원했고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그 카이로스의 시간이 우리를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너무 오랫동안 주어진 시간을 너무 태평하게, 막연하게, 뜻 없이 그리고 정처 없이 흘러가는 그리하여 시간의 노예로 살아감에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나요? 언제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25 시'의 삶에서 해방이 되어서 새로운 안경,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목적을 부여할 수가 있을까요? 언제 우리는 비로소 '1 시'의 삶으로 옮겨지는 일생일대의 대역전을 결단할 수가 있을까요?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안경으로 전에는 보지 못했던 무궁무진한 목적, 꿈, 의미 그리고 가치들을 누리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희망고문이 아니라 진정한 희망이 보인다. 한 인간이 새로운 안경을 끼면서 그가 마침내 코로노스적인 삶에서 카이로스적인 삶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가능함을 보이는 그런 희망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이승철의 '소원'이 내 희망의 진원지이다. 가사 속에서 한 인간이 새로운 안경을 통해서 보여진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감격과 기쁨이 진하게 묻어져 있음을 느낀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길 그 좁은 길로 가길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길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삶의 한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길 원하네"


저는 이 노래 가사를 듣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마음 한구석이 찡하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왜 이 노래에 내 마음을 저격당하고 있을까? 아마도 이 노래에 숨겨진 가수 이승철의 인생 과거사를 알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가수 이승철은 언젠가 방송에서 “내가 학교 다닐 땐 무지하게 놀았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전과 9범이었다. 대마초 두 번 피워서 두 번 (감옥에) 다녀오고, 결혼했다가 한 번 이혼도 했다. 누구나 과거를 잊고 싶은 법이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마이너스였던 내 삶을 평균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너무나 솔직하게 과거를 공개했었다. 대중들의 관심과 팬심을 먹고 살면서 매 순간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갈 '팔자'의 연예인이 '무슨 빽을 가졌기에 저런 용기로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그것도 방송에서 까발릴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뭔가 심연에서 '천지개벽'을 한 것이다.


새로운 안경을 낀 것이다. '25시'가 아니라 '1 시'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가 끼고 있는 그 '색안경'을 다른 젊은이들이 한 번 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물론이고…희망이 희망의 꼬리를 물고 올지. 근묵자흑 (나쁜 사람과 가까이하면 나쁜 버릇에 물들게 되고, 착한 사람과 어울리면 악인도 선인으로 바뀔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고사 성어)이라고 내가 ‘25시’라는 주거지에서 ‘1시’라는 새로운 주거지지로 이사를 하니 내가 속한 가정, 직장, 나라가 다 천지개벽을 할지 말이다. 내 손에 내 가정과 직장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달린 것이다. 당신의 현주소를 좀 말해줄 수 있나요? 어색하지 않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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