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쇼통과 소통
나는 직업상 매주 어김없이 “A Rat Race (끝없는 생존 경쟁)”이라는 레이스에서 전전긍긍 또 고군분투하는 이민 2, 3세들과 삶의 문제들을 논의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나눈 시간을 통하여 새삼 매주 뼈저리게 느끼는 내 삶의 콜럼버스의 ‘아메리칸 대륙 발견’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 있다. 바로 ‘세대차’라는 벽이다. 대서양보다 더 거리감이 멀고 태평양보다 더 멀고 히말라야 꼭대기 보다 더 높은 다름에서 오는 벽이다. 서로를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는 벽이다. 그렇지 않은가. 바다와 육지를 가르는 그 거리도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아니 지구의 끝이라도 가다 보면 ‘세월이 약’이라고 좁혀지지 않는가? 하지만 요놈의 ‘세대차’라는 거리감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걸린다고 해도 좀처럼 가시지가 않을 때가 많기만 하다.
나는 오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근거한 경험과 체험을 중요시하는 ‘아날로그’ 세대이다. 내가 다가가야 할 젊은이들은 ‘인스타그램’, ‘틱톡’, 그리고 ‘유튜브’가 더 편한 ‘디지털’ 세대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당연하겠지만 우린 마치 기름과 물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같다. 어떤 사물들을 인지하고 해석하고 바라보는 관점에서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컴퓨터를 사용하다 그만 엄지족 검지족으로만 살아가다 변질이 되었는지 이 디지털 시대의 젊은이들은 아날로그 시대의 언어를 잃고 만 사람처럼 행동한다. 생일날 그리고 크리스마스 엽서가 사라진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세대차를 극복할 마지막 동아줄로 간주되었던 깨알 같은 정성이 담긴 손 편지는 이제 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할 형편이다. 엽서와 손 편지가 남긴 빈자리를 디지털 세대들이 보낸 다양한 이모콘들이 득실하고 있다. 이제는 ㄱ ㄴ ㄷ 이라는 세종대왕의 한글 외에 괴상망측한 이모콘들도 배워야 할 것 같다. 사람만에게서만 가능했던 그 물씬 풍기는 냄새와 정취 그리고 향기가 없으니 서로가 점점 더 낯설기만 해진 것이다. 뭐라고 할까? 앙꼬 없는 찐빵. 속없는만두, 팥 없는 붕어빵, 드레싱 없는 샐러드, 치킨 빠진 호프집, 그리고 계란 없는 오믈렛이 되어 버렸다.
뭐니 뭐니 해도 세대차의 끝판왕은 어떤 유명 가수의 콘서트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젊은이들과의 세대차를 이겨보려고 기꺼이 함께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러 간 것이다. 꿈도 야무진 것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모두가 손에 아이폰을 들고 모든 장면을 담으려고 제자리를 벗어나 날뛴다. 그 바람에 진작 보아야 할 유명 가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앞사람의 뒤통수와 엉덩이만 보다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신세대 행동이 도무지가 이해가 안 된다. 그냥 아날로그 선배들처럼 그 순간을 가만히 앉아서 마음에 추억 속에 담아서 그냥 즐길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이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가 함께 상호 공존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선배와 후배가 서로 간의 대화가 무언가 빗나가고 어긋나는 선에서 양보하고 배려함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음악처럼 공명이 함께 어우러지게 될 때 진정한 울림이 전해질 수는 없을까? 공명이 함께할 때 서로의 마음에 울림이 다가오고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음의 앙금을 풀어나가는 ‘적당 선’은 어디일까? 대충, 건성, 그리고 눈가림이 득실하는 ‘쇼통’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이 오고 가는 ‘소통’을 할 수 있는 그런 매직 (magic) 접촉선은 어디일까? 나는 오늘도 ‘세대차’라는 이 시대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버릴 ‘신의 한 수’ (silver bullet) 를 찾아 길을 헤매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선상에서 전광석처럼 내 뇌리를 관통하는 단어를 떠 올린다. 바로 감동이라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를 주도할 미래의 젊은이들도 어릴 적에 귀에 한두 번은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믿는 생텍쥐페리의 유명한 소설 ‘어린 왕자’ 중에는 많은 질문이 있다. 그중에 한 질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아니?”,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이 글귀들은 쇼통에 질리고 소통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밝혀준 ‘등불’과 나침반 같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소망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들을 향한 삶의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음을 얻는 것이 공존의 시작이라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세대들에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정작 디지털이 세상을 편리하게 지배하게 되자 사람들은 고약하게도 아날로그시절에 느꼈던 그 불편함을 인간적이고 따뜻한 무엇인가로 포장해 그리워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어느 상아탑의 대학교수님께서 디지털 시대의 주인공들인 대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현대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디지털 시대들에게서 교수는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돈, 명예, 권력, 핸드폰, 엔조이 등등”의 세속적인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의외에도 가장 많은 숫자의 디지털 세대들은 참으로 의미 있는 대답 “감동받고 싶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자연인’, ‘먹방’ 혹은 유사한 수많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색깔이 진하게 묻어있는 프로그램들의 최고의 시청자들이 바로 디지털 세대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참 아이러니의 극치다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세상은 감동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어딜 가나 바야흐로 감동의 시대인 것 같다. 어딜 가나 ‘고객 감동’ ‘고객 만족’ 그리고 심지어 ‘고객 졸도’라는 광고문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참으로 우린 지금 요지경의 세상을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자주 젊은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다름 아니라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라고 한다. 당연히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자주 “성공한 사람들과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는?”이라는 질문을 한다. 당연히 내가 듣고 싶은 정답이 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머리에서 맴을 돈다면 나는 보통의 삶을 산 사람이다. 반대로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가슴을 찐하게 했다면 나는 위대한 삶을 산 사람이다. 일맥상통하게 회자되는 말도 있다. 보통의 삶과 위대한 삶의 차이는 바로 ‘99%는 같지만 1%가 다르다’는 말을 가리킨다. 또 혹자들은 같은 맥락에서 ‘끌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1%가 다르다’, ‘1%의 영감이 없으면 99% 노력은 소용이 없다’라고 하기도 한다. 합하여서 ‘99%의 능력 위에 1%의 감동이 필요한 시대’라는 말로 내 나름대로 정립해 본다.
세상은 1%의 감동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은 자세히 보니 그렇게 얼토당토 또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세계적인 회상 구글은 올해 6000명의 직원을 채용할 예정인데, 그중에서 4000~5000명을 인문 분야 전공자로 뽑을 계획이라고 하는 소식을 접했다. 사뭇 놀라운 뉴스였음을 고백한다. 그렇지 않은가? 구글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최첨단 디지털 회사이다. 디지털의 달인들 젊은이들의 로망의 기업이다. 자연히 디지털에 똑똑한 인재들이 득실하는 회사이다. 그런데 왜 아날로그적인 인문한 계통의 인재를 찾는다고 할까? 회사의 인사 담당자의 말이다. “디지털 기술 못지않게 우리는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정작 ‘사람’이 빠진 디지털 기술은 상상할 수가 없다. 구글의 미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회복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조금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이런 말로 들린다. “달에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수많은 컴퓨터를 이용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지만, 소통은 더 줄어들었다. 아는 사람은 늘어났지만, 친구는 줄어들었다. 사랑할 시간을 가지고, 대화할 시간을 가지고, 당신의 마음의 소중한 생각들을 나눌 시간을 가지도록 하라.” 그렇다. 세상의 어떤 첨단 기술도 홀로서기만을 강조하는 연구실 골방도 필요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보와 기술을 공유하는 광장도 필요하다. 광장의 시대는 서로의 마음을 열고 내 생각과 당신의 생각의 나눔이 있어야 한다. 서로가 쇼통이 아니라 진정한 소통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이다. 진정한 소통은 서로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고 받는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한자로 감동을 느낄 ‘감(感)’ 움직일 ‘동(動)’이라고 한다고 한다. 감동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세상이 온통 불통이다. 불통이면 되는 일이 없어진다. 쇼통의 결과는 뻔하다. 내가 속한 가정이나 직장이나 나라에서 온통 소모전만 있을 뿐이다.
아직도 ‘감동의 시대’라는 말에 긴가민가 하실 분이 계실까 해서 드리는 이야기가 있다. 래리 버드라는 미국 프로농구단 보스턴 셀틱스에서 활약한 전설 같은 스타 이야기이다. 그는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 한 미국 프로농구 역사상 최고 선수 5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에게는 다른 선수들에게는 없었던 특별한 1%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 1%가 무엇일까? 그는 항상 경기를 할 때에 다른 선수들보다 몇 시간 전에 경기장에 나와 자신만의 1 % '의식'을 치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는 다른 선수들이 경기장에 도착하기 무려 두세 시간 전에 곧 경기를 치를 농구 코트에서 머리를 숙인 채 혼자 천천히 공을 드리블하면서 코트를 이리저리 분주하게 오가곤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이런 그의 1%의 다른 선수와는 유별나게 ‘티’ 나는 행동을 본 기자가 물었다. "래리,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보시다시피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단순한 몸풀기 연습 같지는 않은데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청소부처럼 코트 바닥만 살피던데...." "네. 맞습니다. 저는 지금 코트 바닥을 유심히 살피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둘 사이에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곧바로 래리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돌았다. 사람들이 가끔 자신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어처구니없는 그런 이상한 눈으로 보는 상대방에 대한 ‘난처함’, ‘당혹감’, ‘황당함’, 그리고 ‘무례함’에 대한 그런 야릇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래리 선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시합 전 다른 선수가 오기 전에 혼자서 시합을 치를 코트를 드리블 연습도 아니고 슈팅연습도 아닌 단지 코트 바닥에 혹시나 흠이 있는지 없는지 점검합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농구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찰나적인 0.1초 안에 달려 있지요. 그 0.1초의 순간에 혹시라도 농구공이 코트의 흠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튀어버린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을까요?" “경기 도중 결정적인 기회를 물거품으로 날려버릴지도 모를 '흠'을 점검하는데 몇 시간쯤 할애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요?” 물론 그 기자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전설적인 선수의 말에 그 기자는 말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으로 인하여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농구나 풋볼이나 지금은 대세가 데이터 분석 즉 수치와 통계에 의한 디지털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디지털을 고집하는 시대에 아직도 자신만의 아날로그적 습관을 고집하는 래리 버드에게 우리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감동 앞에는 장사가 없음을 래리 버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는 아직도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꼭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만큼 밝은 세상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아직도 우리가 그런 사람이 있기에 이 세상은 이만큼이나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나는 종종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당신의 미래는 오리엔테이션이나 직업 업무 설명서 (Job description)에 있는 그대로 하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99% 같다. 그러나 1%의 감동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주어지는 열정과 정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1의 감동을 주는 인물을 세상과 당신의 기업은 찾고 있는 것이다.
감동의 힘을 주는 한 옛날 어느 마을의 푸줏간 (정육점)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마치고 싶다.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조금은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정육점에서 일하는 사람은 ‘백정’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백정들을 매우 천하게 여기며 아예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마을에 ‘모돌석’이라는 환갑을 넘긴 백정이 있었다. 그가 푸줏간을 내고 장사를 시작했는데 어느 날, 양반 가문의 젊은 자제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간에 고기를 사러 왔던 것이다. “여보게 돌석이! 쇠고기 한 근만 다오!” “알겠습니다.” 백정 노인은 대충 고기를 잘라 그 사람에게 주었다. 그런데 뒤이어 들어온 또 다른 사람은 고기를 파는 사람이 아무리 백정 출신의 천한 신분이었지만, 환갑을 넘긴 노인에게 말을 놓기가 거북했던 모양이었는지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돌석 서방!, 나도 쇠고기 한 근만 주시게!” “아이고, 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뜻밖의 대우에 기분이 좋아진 백정 노인은 제일 좋은 부위의 고기를 뭉텅 잘라 주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먼저 고기를 산 사람이 나중에 고기를 산 사람의 고기가 자기가 받은 것보다 살도 많고 양도 훨씬 많아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따져 물었다. “야 이 놈아! 한 자리에서 똑같이 한 근 고기를 샀는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이 내 것보다 훨씬 많으냐?” 노인은 태연히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손님 것은 돌석 놈이 자른 것이고, 이분 것은 돌석 서방이 자른 탓입니다.”
어떤 가정이든지, 어떤 직장이든지 그리고 어떤 공동체이든지 영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쇼통이 아니라 진정한 소통을 즉 감동을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하는 교훈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든지 군인이든지 기업를 하는 사람이든지 제발 한번이라도 우리에게 그 1%의 무엇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기꺼이 우리도 다 주고 싶은데. 모두가 도토리 키재기이다. 모두가 99% 는 살아가는 방식이 똑같다. 남들 만큼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고만고만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나 내 가정은 직장은 나라는 다르게 살아갈 기회가 있음을 기억하자. 바로 내 안에 그 세상의 누구도 가지지 못할1%의 감동이 있음을 기억했으면 참 좋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