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켐프, 꿈, 발자
여러분 세상에서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은? 물론 에베레스트 산으로 그 높이가 8,848미터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 최고 높이에 오른 사람은 과연 몇 명쯤 될까요? 1800년대부터 '지구의 지붕' 혹은 '세상 꼭대기'라는 에베레스트는 많은 산악인들에게 정복의 로망이었다. 1953년 세계최초로 뉴질랜드의 힐러리 경이 오르기 전까지 에베레스트 는 모두에게 단지 난공불락과 같았다. 쉽게 그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게 곁을 잘 내주지 않았던 ‘넘사벽’의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오직 인간의 한계를 진정으로 극복한 위대한 탐험가만이 넘볼 수 있었던 멀기만 했었던 꼭대기이었다. 그러다가 그 에베레스트 등정의 역사에 불멸의 큰 획을 긋게 된 해가 있었다. 바로 2004년도를 전후하여 마침내 베일을 벗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왔었다. 왜냐하면 2004년을 기준으로 해서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성공하는 산악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평균 잡아 일 년에 두세 명이 고작이었지만 2004년 이후부터는 '세상 꼭대기' 등정에 성공하는 산악인의 수가 대략 300배 이상 껑충 뛰어올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등산 장비의 향상 때문이라고 한다. 또 혹자는 높아진 산악인들의 체력 때문이라고도 한다. 둘 다 아니다. 비밀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산 정상을 향한 첫 발걸음이고 첫 단추 역할을 하는 베이스캠프의 높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해발 2,000미터 정도에서 설치되었던 베이스캠프를 2004년 부터는 6,000 미터나 되는 높은 곳에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베이스 켐프가 무려 4,000 미터 정도 더 높아진 것이다. 높아진 베이스캠프의 결과는 순식간에 나타났다. 출발점을 높이자 난공불락 같았던 에베레스트를 누구나 쉽게 정복할 수 있는 '동네 산'이 된 것이다. 예전에는 힘들게 맨 밑에서부터 올라갔는데 요즘엔 6천 m 높이에 설치한 베이스캠프에서 시작하니까 막상 올라야 할 거리는 얼마 안 되는 덕이다. 산악인들에게는 이 6,000 미터 지점에 설치된 베이스켐프는 ‘제2캠프’라고 칭해진다. 그러나 이 지점은 이름 그 이상의 큰 상징적인 전환점이 되는 것이다. 원정대원들에게 이 지점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또 하나의 베이스캠프와 같았다. 어쨌든 그들은 산의 높이 8850미터 중에서 50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으니 나머지 2850미터만 죽기 살기로 올라가면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5000미터 지점에서 등정을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라. 3000미터 지점에서 등정을 시작하는 사람과 산 높이의 절반이 넘는 5000미터에서 시작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성공할 확률이 높을까? 결국 이미 5000미터나 올라왔다는 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고, 이제 3000미터만 더 올라가면 된다는 사실이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8년 이후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사람들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났던 것이다.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할 거리가 짧아졌으니 당연히 정상에 올라갈 확률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세계의 ‘넘사벽’ 지붕이 북한산 타기 정도가 된 것은 발상의 전환의 덕택이었다. 더 상세하게 표현하자면 ‘베이스캠프’에 대한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이 ‘베이스캠프’를 둘러싼 발상의 전환을 통하여 우리 인생에도 이런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 없이 남을 따라 하고, 편하고 안전하고 쉬운 곳에 머무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자기 삶의 베이스캠프를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해야 한다. 그것이 성공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여기서 성공이 란 단지 큰돈을 벌고 대단한 권력을 움켜쥐는 세속적인 성공만이 아니라, 넓게 인식하고 길게 내다보며 높은 인격을 갖추는 인간적 성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생의 베이스캠프를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결론을 내어본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요?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삶의 베이스캠프를 다른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곳에 높이 한 번 쳐보시라.
물론 여기서 말하는 베이스캠프는 당신의 생각의 베이스캠프이고, 상상의 베이스캠프다.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려면 베이스캠프를 높이 쳐야 한다. 베이스캠프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여기는 그런 지점이 아니라 당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고 또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가장 높은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베이스캠프에서 정상이 눈앞에 바로 보일 수 있도록 충분히 높아야 한다. 그리고 기억하라. 당신이 새롭게 지정한 베이스캠프는 당신의 꿈의 정상까지의 거리를 최대한 단축시키는 지점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우리에게 낮은 베이스켐프를 높이 정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기를 잘 닦아서 한번 기준을 높여 잡고 이에 적응만 된다면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한결 수월해지는 것이 또 인생이다. 소위 성공 경험의 중요성이다. 운동경기에서도 1등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나 팀이 더 쉽게 우승컵을 거머쥐게 된다. 우승 경험이 없는 선수는 종종 초반에는 잘 나가다가도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각자에게 자리하고 있는 베이스캠프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우리에게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신기한 힘이 있더라.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같이 우리 네 삶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의 베이스캠프를 조금이라도 상향 조절하면 올린 만큼 거기에 맞게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됨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했고 더 단단했었다. 우리의 지금까지 살아온 발족이 다 말하고 있다. 어느 한순간도 만만하지 않았고 쉽지 않았다. 에베레스트 산 이상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쉽게 곁을 잘 주지 않았다.
언젠가 나의 가슴을 멈추게 할 만한 사진들이 신문에 실렸다. 유명 축구 구단의Manchester United F.C. 축구팀의 박지성, 한국이 낳은 역대 세계 최고의 피겨 스케이팅의 여왕 김연아, 갈색 폭격기 차범근 선수 겸 코치, 그리고 세계적 명성의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발레리나 강수진들의 발들의 사진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난공불락으로 절대로 넘 보지 못하고 생각조차도 못 할 '에베레스트'이라는 험하고 험난하기 만 했던 높은 벽을 뛰어넘고 자신들의 분야에서 우뚝 선 대한의 영웅들, 선구자들이자 개척자들이다. 축구, 피겨 스케이팅과 발레 불모지에서 이제는 절대로 넘볼 수 없었던 '에베레스트' 정상을 이제는 누구에게도 넘볼 수 있는 가능성으로 만들게 한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사진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피와 땀과 눈물의 결과임을 보면서 애절하고 처절한 싸움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오늘의 위업을 세운 그들에게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이들은 하나같이 유럽과 백인들의 텃세가 유난히 심했던 빙산계, 무용계와 축구계에서 외로운 마이너리티로 좌절했을 법도 한데,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뼈만 앙상하게 도드라진 발에 울퉁불퉁 비정상으로 튀어나온, 관절 마디마디 옹이가 생긴 못생긴(?) 발들이 그들이 오늘의 꽃길이 오기까지 헤쳐온 가시발길의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발은 고된 연습을 견디느라 발톱이 갈라지고 깨어지고 부러 트고 곪고 상처투성의 발이 되었다.
그들이 위업이 더 위대한 것은 그들은 가장 낮은 지점에 있었던 ‘베이스켐프’에서 감히 지구의 꼭대기 정복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모’했었고 또 ‘겁’ 없었던 도전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손흥민이나 수많은 후배들에게 베이스켐프를 좀 더 높게 잡는 것도 가능했음을 말해준 것이다. 만약에 수십 년 전 박지성, 김연아, 차범근 그리고 강수진 같은 대한의 영웅들이 운명처럼 간주되었던 그 턱없이 낮은 베이스 켐프의 삶에서 편안하게 또 대충 살았더라면 오늘의 손흥민이 가능했을까? 내가 잘나서 오늘에 온 것은 하나도 없다. 다 앞서간 선배들의 베이스켐프 위에 나가 공짜로 시작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내가 세운 베이스켐프가 또 누구에게 베이스켐프가 된다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내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조심스러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언젠가 오스카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미나리> 영화를 이민 1세, 2세 그리고 3세들과 함께 보았다. 이민 1세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두가 '남 얘기 같지 않다'고 했다. 저도 정이삭 감독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아니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인데 왜일까?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았지만, 꿋꿋하게 버텨낸 이민 1세대들의 애환과 눈물이 바로 나의 이야기 그 자체였기 때문이라 생각을 한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와서 이제 이민 생활 40년을 훌쩍 넘겼다. 이민 2세 정이삭 감독이 <미나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들은 얼마나 조국이 그리웠던가. 반세기가 지났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도 경험해야만 했었다. 그래도 척박한 환경에서 더 진한 향을 낸다는 내 고향의 미나리처럼, '미나리'라는 영화의 제목부터가 우리들에게 잃어버렸던 이민자의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동안 한국 국내에서 ‘미국에 정착하기 위한 한국인 가족의 애환’ 묘사는 그동안 너무 도매값으로 부정적이었다. 수박 겉핥기식이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같은 동포들이 우리에게 두 번 상처를 주곤 했었다.
그러나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는 문화 충돌과 세대 갈등이 어떻게 비 온 뒤 땅 굳어지듯 고립무원의 낯선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견뎌내는 가족의 결속으로 이어지는가를 우리 스스로 확인케 해 주었다. 한마디로 마음의 정화의 카타르시스 역활을 한 것이다. 특별히 아이삭 감독의 아버지 정한길(75)씨의 감정의 목소리에 나는 동질감을 느꼈꼬 혼자서 그 아버지의 소감을 들으면서 조용히 눈물을 머금었다. 아버지 정 씨는 “어릴 적 아들이 고질병을 앓아서 의료진에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영화를 보면서 아들에게도 얼마나 힘든 시절이었을까 생각하니 새삼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정 씨는 아들의 영화를 보고 “아내가 먼저 울고 나도 따라서 울고, 결국 온 가족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아마도 수많은 이민자들이 그날 꼭꼭 눌러둔 애환들을 되새겨 보았으리라 믿는다. 그들에게도 정화의 카타르시스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특별히 아이삭 감독의 부모님에게 감사한 것이 있다. 훌륭한 아들의 뒤에는 역시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이삭 감독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베이스켐프를 높게 설치하게 했다. 다른 수많은 한인 부모님들처럼 회계사, 의사와 변호사 같은 '철밥통'의 쉬운 길을 고집하지 않고 한인들이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 길을 닦아가면서 가게 한 것이 너무나 고맙기만 하다. 왜냐하면 정이삭 감독은 이제 어디에선가 제2, 제3의 또 하나의 <미나리> 감독에게 '에베레스트'를 향한 베이스켐프를 높이 설치케 하게 한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막혀 있었던 물꼬를 트게 한 선구자이고 개척자이다. 그 베이스캠프에서 제2와 제3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또 김용 같은 제 2의 세계은행총장들에게 '에베레스트'가 더 이상 난공불락의 금지구역이 아니라 도전해야 할 정상임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미국의 문화계에서 조차 변두리에서 있던 우리 한국의 후손들이 서서히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린다. Glass ceiling (유리천장) and bamboo ceiling (동양인들을 향한 천장) 등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 2세들 길을 막았던 난공불락의 벽들이 깨어지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내 귀를 후벼 파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미국의 한 국민학교 교실에서 우리들의 3세 그리고 4세가 내 꿈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할 때 감히 코웃음을 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누구도 한 한인 여자 학생이 백인들 흑인들 앞에서 “내 꿈은 언젠가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타는 것이다” 할 때에 ‘꿈도 야무지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윤여정 씨의 아카데미 수상식 장면을 보면서 미국 사람들은 이제 한인의 얼굴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덕택이다.
끝으로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또 직장에서 또 공동체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분류되는가? 베이스캠프를 높이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아니면 베이스캠프를 낮추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기억하시라. 나로 인하여 내 후손들 미래의 삶에 베이스켐프가 턱없이 낮아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한번 냉정하게 거울 앞에 서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손을 가슴에 얹고 가장 정직하게 내 심장 소리를 들어 보면 어떨까요? 당신이 정치 지도자이든, 기업가이든, 운동 선수이든 또 가장이든 당신 덕택에 모두의 베이스켐프가 높아졌나요? 아니면 당신 때문에 우리 모두의 베이스켐프가 턱없이 낮아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