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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

발걸음, 헌신, 사랑

by Joung park

지인 중에서 정원을 유난히 잘 가꾸는 분이 계신다. 정원 가꾸는 일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주위에서는 ‘마이다스 터치’ 혹은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칭한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화분을 구입해서 키우는데 그 지인의 정원에 심은 꽃들은 유한히도 잘 자라고 나의 정원에 심은 꽃들은 극명하게 다른 '결과물'이 된다. 도대체 그 지인의 정원에 꽃들이 잘 자라는 비결은 무엇일까? 언젠가 그가 한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황당하기까지 했다. "여보게! 정원의 꽃들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네."


생각해 보니 이런 말을 들은 것은 그 지인이 처음이 아니었다. 언젠가 집 어항에서 유난히 금붕어를 참 잘 키우는 분이 하신 말씀이 있었다. "어항 속에 금붕어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단지 미물들의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잠언들이 아니었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더라. 병원에서 일하는 한 간호사가 한 말이다. "병원의 환자들은 자신들을 돌보는 의료진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치유가 된다." 또 심지어 양로원의 노인들도 자식이나 사랑하는 가족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목사인 저도 공감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교회는 성도님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를 듯한 이야기들이다. “곡식은 (벼)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라는 말을 심층 해부해 보라. 쌀은 한자로 ‘米’(미)라고 쓴다. 열십자(十)를 가운데 두고 여덟팔(八)자가 위아래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양이다. 무슨 말인가? 한 톨의 쌀을 얻기 위해서는 88번(八十八)의 농부의 정성 어린 발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농부가 추수라는 풍년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벼를 심고 논. 밭을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돌아보면서 작물의 시기적 생육 과정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물 대기, 병충해, 잡초 등 재해를 사전에 예방키 위한 발걸음이 필수적이다. 농업 강국 네덜란드에서는 농사를 잘 짓는 농부를 ‘Green Finger’, 즉 ‘녹색 손’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식물의 잎과 줄기를 하도 많이 만져서 손이 녹색으로 물들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농사는 아무나 뛰어드는 직업이 아니라 아니라 고왔던 손이 벼처럼 변할 수 있도록 각고의 온갖 정성을 다할 수 있는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의 '소명'의 현장이라는 말이다. 요즘 도시의 젊은이들이 귀농을 한다고 한다. 기억해야 할 잠언이다. 농업은 디지털 시대의 신기술과 첨단 기술도 필요하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상징적인 뛰는 발걸음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을 낳는 일에는 지극 정성과 애타는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다. 매일 먹는 밥이 질리지 않으려면 식탁에서 농부들의 바쁜 발자국 소리에 고스란히 아우러진 마음(農心)을 생각하는 것이 먼저이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라는 말은 결국 자기가 가꾸는 농작물을 자주 그리고 주의 깊게, 자식을 보살피듯 사랑을 갖고 오매불망 참고 기다리라는 말이다. 어떠한 농업기술보다도, '관심'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짧게는 몇 주, 몇 개월, 길게는 1년 지어서 하는 농사에도 이렇게 매일의 관심이 필요한데 자식을 키우는 일도 오죽하랴. 설마 엄마가, 아빠가, 부모가 그럴까 싶겠냐마는 자녀들이 어릴 적에 키우며 잠시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방심하는 시기가 있었다. 몸에 배어 있는 습관들로 인해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은 반복적으로 해가지만, 마음을 쏟아 아이를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하게 될 때가 있게 된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아이들의 삶의 명암이 교차하는 순간들 속에서 부모의 진정한 사랑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하고 했던 순간들의 흔적이 티가 난다. 역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했었는데. 작물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듣듯이 아이는 부모의 숨소리를 한순간도 잊지 않고 듣는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엄마가 아이와 함께 호흡해 주는 것. 아이의 리듬에 반응하고, 아이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아이의 시선에 표현해 주는 것이 아이를 자라게 만든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희한하게도 부모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에서 자란 아이들은 눈에 보기에도 확연하게 병마와 고난에 강한 면역력이 생김을 왜 몰랐을까? 어른들이 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티가 난다.'라고 했는지 몰랐을까?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라는 말은 결국 우리들에게 한낱 일개의 미물까지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서 마음을 읽는 것이라면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무엇을 할 때에는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 냐가 일의 성공과 실패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 왜 우리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은 기억하면서도 '어쩌다', '어정쩡', '죽지 못해', '마지못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그리고 '억지로' 일을 하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는 미물까지 밤새 내내 듣는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 들판에 황금빛 곡식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분발하자. 부지런히 발자국 소리를 내자. 모든 것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을 붙잡고 내 자식에게 못다 한 사랑의 발자국 소리를 내자. 어떻게 아나요? 모든 일은 미리부터 '내가 질 거야'라고 생각해 겁을 먹거나 또 지레짐작으로 판단할 수 없고, 실제로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보아야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나요? 지금이 내 인생의 절호의 골든타임이라 생각하고 내 자식에게, 내 부모에게, 내 형제 또 내 공동체에 사랑의 발자국 소리를 내자. 내 진정한 사랑과 걱정의 마음을 저 멀리서도 느끼고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모내기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종종 할아버지는 일꾼들을 사서 모내기를 하시는데,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해가 짧으냐고 일하는 시간을 아쉬워하신다. 그런데,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들은 왜 이렇게 해가 길고 넘어가지 않느냐고 불평을 한다. 아무리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니 일꾼들은 아침에 출근해서 화장실에서 30분, 물 한 잔 마시면서 15분, 담배 물고 10분 어떻게든 하루를 구겨 내버리기에 급급하면서 하루 일당이 나오기만을 바라는 사람이다. 쉬는 시간은 왜 그렇게 긴지! 도로가에 쭉 늘어앉아서 오랫동안 쉬는 모습은 저 사람들이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하루 일당을 얼마나 받는지 모르지만 주인으로서 일을 하는 자세와 잠깐 고용되어 일하는 자세는 너무나 차이가 있다. 눈 감고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가 주인인가 일꾼들인가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제가 어렸을 적에 마을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울력(공동작업)을 나가 땀을 흘리면 3대가 폐망한다"라는 말이다. 어쩌면 일제하에서 동원된 입장에서 맡겨진 일을 설렁설렁하고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습관에서 나온 잔재가 아닐까. 우리나라가 좀 더 발전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되려면 이러한 머슴 형태의 일은 버려야 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로서 발걸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다.


얼마 전 친척 중 선교사님으로 수고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저의 집으로 오신다는 연락을 갑자기 받았다. 이곳에 위치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시고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근처에 위치한 저의 집으로 들리시게 된 것이다. 얼떨결에 아내가 오지에서 고생을 하시니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특별하게 맛있다는 소문이 난 곳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그때가 오후 8시 20분 정도이었다. 인터넷으로 체크해 보니 분명히 9시까지는 문을 연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달려서 식당에 도착하니 8시 45분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원래 아내가 알고 간 그 집은 벌써 불이 꺼져 있었다. 9시면 문을 닫아서 그렇구나. 포기하고 돌아서려다가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니 옆집에는 불이 환하게 아직까지 켜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급하니 할 수 없었다. 그 가계로 발걸음을 황급하게 옮겼다. 마침 종업원으로 보이는 히스페닉 아주머니 두 분이 가게 앞에 서 있어서 물었다. “지금 여기 문 열었나요?” “지금은 주문이 안 됩니다. 내일 아침에 오세요.”


아 역시 오늘은 안 되는가 보다. 포기하려는데 식당 안 계산대 앞에 한 60세 정도 돼 보이는 중년 남자가 보인다. 뭔가 계산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주인임이 틀림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 지금 음식 주문되나요?” “여기서 드실 건가요? 그건 좀 곤란한데.” “아뇨. 포장해 갈 건데요.” “몇 인분요?” “10인분.” “아 포장은 됩니다.” “야 2층에서 누구누구 다 빨리 내려와라. 여기 손님 왔다.” 순식간에 단번에 종업원 5명과 주인이 합쳐서 음식 10인분을 후다닥 다 구워냈다. 나는 단번에 일하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업원인지 알수가 있었다. 왜 그 가계가 유명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가계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것이다. 돌아오면서 자동차에서 아내에게 한 말이다. "아. 역시 주인이 다르구나. 이래서 식당이 잘 되려면 주인이 나와 계산대에 앉아 있어야 한다고들 얘기하는구나." 영국 속담에 “하인 열 사람의 눈보다 주인 한 사람의 눈이 밝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의 시력은 탁월하고, 하인의 시력은 저조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주인의식 때문입니다. 즉 책임감을 말합니다. 갑자기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옛날 유행가가 생각이 난다. 가사를 이렇게 바꿔서 불러보면 어떨까 싶다. "그나저나 앉기만 하면 진짜 다 주인인가. 주인 의식을 가져야 주인이지"로 말이다. "아무나 주인인가 발걸음이 달라야 주인이지"라는 후렴은 또 어떨까 싶다.


신학교 졸업식에서 소개된 이야기인데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시절, 미국에서 낙하산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는 낙하산 만드는 기술이 낙후되어 있어서 20개 중에 하나는 하강 시 펴지지 않는 불량품이었다. 전시에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공수부대원 20명 중에 하나꼴로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다는 끔찍한 얘기였다. 고심하던 군 관계자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낙하산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본인들이 제작한 낙하산을 ‘먼저’ 시험해 보도록 시킨 것이다. 그 결과 불량품이 거의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원칙은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남 좋은 일이 아닌) 내 것인 양, 내 것이 되는 것처럼 오너십(ownership, 주인의식)을 갖고 하면 훨씬 좋은 퀄리티의 결과를 얻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은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룰 확률이 높다.


언젠가 아버지의 날 영화 '국제시장'을 아이들과 함께 봤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영화는 아버지 덕수네 (황정민 분) 가정이 6.25 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가면서 일어난 일 이야기이다. 흥남 부두에서 헤어지면서 덕수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네가 이 가정의 가장이다.” 이 말 한마디가 덕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을 이 영화는 그리고 있습니다. 가장 덕수는 가장이기에 한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디기 시작을 한다. 자신의 꿈은 헌신짝처럼 버려버리고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덕구는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파독 광부로, 이후에는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길도 마다했었다. 오직 가족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덕수의 처절한 삶의 전쟁은 그야말로 눈물겹기만 했었다. 덕수의 험난한 발걸음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이 땅의 그리고 우리 이민 1세들의 발걸음 소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기 시작을 했다. 영화 마지막 신에서 아버지 정진영의 사진을 바라보며 “아버지 나 힘들었어요”라고 흐느끼는 덕수의 외침은, 일평생 그의 어깨 위에 놓인 짐의 무게가 어떠했는지를 또 그의 발걸음의 무게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실감케 했었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훗날 내 자녀들은 어떤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을까? 나도 훗날 자랑스럽게 “나 힘들었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발걸음의 삶을 살았을까?라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여러분 혹시라도 오늘 시간이 되시면 직장에서 내 동료들, 상관들 그리고 내 가정에서 내 가족들이 나의 어떤 발걸음 소리를 들을까 한번 고민해 보시지 않을래요? 또 더 나아가서 오늘 직장에서 가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에 관심을 한번 가져보시지 않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 계신 그분께서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어떤 발걸음 소리를 내고 있는지 귀를 쫑긋하고 유심히 듣고 계신다는 사실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아나요? 내 자녀, 내 가정, 내 직장 그리고 내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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