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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1류 사람 아니면 3류 사람?

감사, 습관

by Joung park

이 놈의 흘러가는 세월을 멈출 수도, 잡을 수도 또 밧줄에 꽁꽁 묶어서 꼼짝달싹을 못하게 할 수는 없을까? 제발 그 자리에서 날 기다려 줄 수는 없을까? 왜 자꾸만 막무가내 또 무지막지하게 앞서가면서 나를 깝칠까? 옛 조상님들의 말씀처럼 이 놈의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똑딱똑딱' '째깍째깍' 고장도 한번 나지 않고 잘만 돌아간다. ‘아니 벌써’라는 내 입에서 튀어나온 시간을 향한 세월타령이 무색하게 또 11월이 성큼 다가오고 말았다. 이제 2023년도 달랑 한 장의 달력만을 남기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웬일인지 11월 달은 나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일 년 중에 가장 큰 절기인 추수감사절이 코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말인가? 마냥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것들 뿐인데....


그래도 어떡하나 감사하라고 이렇게 특별하게 절기까지 정해준 마당에 밑져봐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눈 비비고 감사거리를 한번 찾아보자. 찰스 스펄전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한 자루의 촛불로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별 빛을 주시고, 별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 코로나-19라는 반면교사가 우리에게 가리킨 것이 있다. 항상 매 순간을 마지막인 양 가장 처절하게 가장 간절하게 생각하면서 삶을 돌아보라고 말이다. 그러면 매 순간이 감사라는 보물단지가 보일 것이라고 한 내 인생의 잠언이다.


오늘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컨트리 음악 가수,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4의 우승자 그리고 머리짱, 목소리짱 그리고 얼굴짱의 ‘엄친아’ 캐리 언더우드가 ‘컨트리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불렀던 노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O Lord my God!)” 를 영상으로 함께 감상을 했다. 언제 들어도 그 장엄하고도 감동적인 느낌은 여전하기만 하다. 여기에 1절과 2절의 가사만을 옮겨본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2절 숲 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담겨진 영상은 많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 영상을 젊은이들에게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나는 젊은이들이 그날 전통 깊은 시상식에 참여한 수많은 기라성 같은 미국의 컨트리 뮤직 가수들이 캐리 언더우드가 노래를 할 때 보였던 너무나 꾸밈없고, 솔직 담백하고, 또 전혀 각본과 연출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얼굴 표정들을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카메라에 적나라하게 잡힌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뭔가에 총 맞은 표정들이었다. 왜일까? 왜 무대에서 자신들의 감정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이 프로페셔널들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을까? 잘못하면 하루아침에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음을 알 텐데..


정답은 한 수상자에게서 왔다. 오늘 시상식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참 뜻밖의 대답이 왔다. 하이라이트는 자신이 받았던 토르피가 아니라 단연코 캐리 언더우드의 노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게 해주었다고 한다. 오늘까지 오면서 앞만 보고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향해 달려왔다. 한순간 한순간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가시발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파란만장이 기고만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오늘까지 자신들을 부모님과 도운 사람들이 많았다 돌아보고 싶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중간에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 지금까지 지내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나와 젊은이들 사이에 잠시나마 불편하고 어색한 그런 숙연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냉랭한 분위기를 탈피하고자 내가 젊은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혹시나 오늘 모임에 오면서 길선상에 낙엽의 색깔이 변하고 있음을 보신 분이 있나요?” 그리고 또 즉석 앙케트 조사를 했다. “혹시나 당신은 지난 한 달 동안 달을 몇 번이나 보았나요?” 돌아온 답변이 가관이다. 무려 한 달 동안 달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람이 절반이 훨씬 넘었다. 그만큼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어떻게 달을 볼 수 있었던 한가한 시간은 아예 포기하고 살고 있었던 요즘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보게 되었다. 정말이지 요즘은 과연 세상이 각박해서 살아가기가 힘든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점점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세상이 각박해져 가는 것일까.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엉뚱한 그렇지만 대단히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꽃을 보는 마음이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꽃의 아름다움이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꽃은 객관적으로도 아름답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을 보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꽃을 정말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또 어떤 사람은 꽃을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시도 쓰고 노래도 만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꽃을 보고도 무덤덤합니다.


정말이지 요즘 젊은이들은 바빠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가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2세 3세들은 느낌표를 잃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일상생활 속에 감사해야 할 일들이 차고 넘치지만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져 있거나 그들에게 전혀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보지를 못하니 감사는 아예 삶에서 사라진 지가 오래되고 말았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생활 속에 감사함을 잊지 않고 소중함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면 참으로 좋겠지만 다 희망고문일 뿐이다.


젊은이들과 제가 좋아하는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시를 공유한다.

"우리 언니는 시를 쓰지 않는다.

아마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시를 쓰지 않았던 엄마를 닮아,

역시 시를 쓰지 않았던 아빠를 닮아

시를 쓰지 않는 언니의 지붕 아래서 나는 안도한다.

언니의 남편은 시를 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할 것이다.

제아무리 그 시가 ‘아무개의 작품’이라고 그럴듯하게 불린다 해도

우리 친척들 중에 시 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언니의 서랍에는 오래 된 시도 없고,

언니의 가방에는 새로 쓴 시도 없다.

언니가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해도

시를 읽어 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는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끓인 수프는 특별한 사전 준비 없이도 그럴싸하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절대로 원고지 위에 엎질러질 염려가 없다.

가족 중에 시 쓰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그런 가족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결국 시인이 나왔다면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는 법은 없다.

때때로 시란 가족들 상호간에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세대를 관통하여 폭포처럼 흘러간다.

우리 언니는 입으로 제법 괜찮은 산문을 쓴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글쓰기는 여름 휴양지에서 보내온 엽서가 전부다.

엽서에는 매번 똑같은 약속이 적혀 있다.

돌아가면

얘기해 줄게.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멍 때리는 시이다. 누구나 공감할 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들을 향한 날카로운 꾸지람과 창피를 느끼게 하는 시이다. 그렇지 않은가?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삶에 윤활유가 되어야 할 시와 노래가 사라졌습니다. 감탄과 감사가 사라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감탄이 있어야 할 그 커다란 빈자리를 불평과 불만이 꽉 차고 있다.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을 잃어버린 채 바쁘게 살다 보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꼭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그런 소문난 곳에 가야만 ‘아! 정말 멋있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의 삶의 현장에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들이 이렇게 “천지빼까리”이었는데 왜 나만 모르고 있었을까?


그런데 왜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 속에 살면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로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낄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 마음속에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어느새 다 당달봉사가 되고 말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삶의 주인공이 바로 나다. 아예 얼굴을 땅에 파묻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담을 쌓고 살기로 작정을 한 것 같다. 왜 이렇게 세상에 공기가 탁해지고 왜 불평과 불만만이 허공을 가득 차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왠지 오늘따라 괴테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도스토예프스키의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은 두 발 달린 동물’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고 아픈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을 갖는 것이다”라는 말은 그렇게 허무맹랑한 말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감히 이 성인들의 대열에 끼어들어본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다. ‘기는 사람 위에 걷는 사람, 걷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나는 사람 위에 감사한 사람이 있다.’ 또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세상에는 난 사람, 똑똑은 사람, 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 즉 일류의 사람은 다름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에 감사할 줄 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모든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단연코 삼류의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젊은이들에게 세상이 인정하는 일류의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한다.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삼류의 사람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분명히 그는 우리 젊은이들이 벤처마케팅을 해도 될 그런 일류의 사람이다. 일본 기독교인이었던 이무라 가즈오씨의 ‘일류 인생’의 이야기이다. 그는 일본 오사카의 한 병원 내과의사로 근무하다 암으로 오른편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한 후에도 의사의 사명을 다하다가 암이 폐로 전이되어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기록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가 보다”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천천히 마음으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당부를 드린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것에 사람들은 왜 감사할 줄 모를까?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

형제가 있고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손이 둘이고 다리가 둘이고, 손을 뻗어 무엇을 잡을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멋지고 감사한 일이 있을까!

그런데 아름답고 귀한 것이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르고

그거야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 세끼 밥 먹고, 밤이 오면 잠자고, 다음날 아침을 맞는다는 것,

웃고, 울고, 노래하고, 소리치고, 뛰어 다닌다는 것,

산에 오르고, 바닷가를 거닌다는 것,

온갖 자연의 멋지고 아름다운 것에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산다는 것,

너무나 희안한 일이 아닌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눈물 나게 소중한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아무도 무른다.

그걸 아는 사람은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가지고 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좋은 환경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감사를 선택할 때 감사한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민 2세 그리고 3세들에게 한국의 ‘광수 생각’의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하고 싶어 진다. 입시를 앞둔 학생이 수업 중에 아뿔싸 연필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순간 학생은 당황한 기색으로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을 한다. “아, 난 영락없이 이번 시험에서 떨어지겠구나.” 바로 그때 곁에 있던 친구가 연필을 주워서 다시 바닥에 떨어뜨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너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야. 봐 이 친구야, 연필이 바닥에 붙었잖아.” 동일한 사건을 두고 한 사람은 부정적으로, 또 한 사람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무슨 뜻인가요? 습관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까지도 바뀐다"라고 습관의 중요성을 설파한 윌리엄 제임스의 명언이 오늘따라 빛나는 순간입니다. 감사하는 습관이 자리매김을 하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처럼 감사하면 복이 온다는 말이 우리들의 삶의 현주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가 습관이 되어 우리 모두가 삼류의 사람에서 일류의 사람으로 탈바꿈을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어떻게 아나요? 내가 변하니 혹시라도 내가 속한 가정, 직장, 공동체, 그리고 나라가 삼류에서 일류로 다시 태워 나는 순간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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