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란. 잘산다는 것이란
마치 습관처럼 한 해의 끝자락이 되면 나 자신에게 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곤 하는 질문이 있다. 바로 “올 한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 아니면 더 나빠졌습니까?” 즉 Has this year been better than last year?” 아니면 “Are you better off today than you were year ago?”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1980년 지미 카터 민주당과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의 공개토론에서 나온 것이다. 레이건 후보자는 마치 오랫동안 예리하게 칼을 갈면서 준비해 왔던 사람처럼 국민들을 향하여 시대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비수 같은 질문을 던졌다. “국민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생활이 4년 전보다 더 나아졌나요? 아니면 더 나빠졌나요?” 훗날 많은 사람들은 "그날 밤 카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확실히 아무도 없다. 그러나 모두들 레이건의 특유의 수사적 질문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회상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 뒤, 레이건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천편일률적으로 뻔하고도 판에 박힌 반응을 보인다. 어제보다 더 높은 월급과 연봉을 받았는가? 작년보다 더 비싸고 큰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가? 남집 아이들 보다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가? 전보다 더 집값이 오르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가? 등등이 판단의 잣대가 되곤 한다. 그런데 정말 달라진 집 평수나 달라진 자동차 크기로 ‘내 삶이 지난해 보다 더 성공했다고, 더 나아졌다고 아니면 더 나빠졌다’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마는 아닌 것 같다.
미슐랭 쓰리 스타에 빛나는 프랑스 최고의 천재 요리사 ‘베르나르 루아조’가 약간의 나이인 52세에 사냥용 엽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얼마나 유명한 요리사였는지 그가 자살하던 날 프랑스의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정규 뉴스 시간에 그의 자살 소식을 보도했고, 그의 장례식에는 프랑스의 일급 요리사들을 비롯해 2000여 명이 운집했다. 불란서의 유력지 일간지 르 몽드는 "사람은 가도, 요리는 남아서 진화한다"라며 루아조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런 그가 왜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택했을까? 루아조는 레스토랑 '라 코트 도르'를 운영하면서 지난 27년간 줄곧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식당 안내서 '르 기드 루즈'에서 최고 등급인 별 세 개의 평가를 받아 왔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올해 초에 발간된 그 안내서엔 그의 식당이 두 등급이나 강등, 별 한 개로 떨어져 있었다. 동료 요리사들에 의하면 루아조는 "나는 항상 1등이 되려고 했는데, 이제 2등도 아닌 3등이 됐다"고 한탄하면서 괴로워했다고 한다.
장장 27년간이나 프랑스에서 최고의 요리사로 군림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만큼의 정상에서 그 만큼의 재물과 그 만큼의 명예를 누리다가 이제 비록 별 한 개의 등급으로 떨어졌을지라도, 다른 삶의 마무리를 할 수가 없었을까? 평생 최고의 요리사로 살아온 자신의 경륜과 솜씨로 타인에게 봉사하며, 타인과 더불어 노후를 즐기며 사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별 두 개를 잃었다 하여 그는 자신의 생 자체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곁으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자 요리사이었지만 속으로는 가장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누가 그에게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더라면 그가 무엇이라 답을 했을까?
바야흐로 이 시대는 ‘엘리트 직업인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가 가파른 고공행진을 펼치고 있다. 가장 빨리 경제대국이라는 명예권에 진입을 한 나라지만 동시에 가장 빨리 자살률이 높은 나라라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세계 신기록을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잘 가는 자’들이 자살이라는 길을 택해야 할 만큼이나 세상살이가 각박하고 험하다고 한다면 ‘흙수저’ 또 이것저것 다 포기해야 하는 ‘5포’ ‘6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 아니면 나빠졌습니다?”의 질문에서 돌아올 답변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 어떤 잣대로 나의 삶을 정의하고 재어봐야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 아니면 나빠졌습니다?”라는 질문 앞에서 당당히 ‘이만하면 감지덕지이요”라고 답할 수 있을까? 나로 하여금 살기가 너무 힘들다에서 세상은 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케 한 시가 있다. 바로 랠프 월도 에머슨의 ‘성공이 무엇인가? What is Success?’라는 시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의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 나로 인해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했다면 나의 삶은 진정한 성공이다’라는 구절은 듣기만 해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도 하고 또 무겁게도 한다.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삶은 성공이라는 말은 어마무시한 위안을 준다. 그러나 반대로 살면서 한 사람도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는 말은 우리에게 어마무시한 자괴감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내 속만을 챙기려고 혈안이 되었구나라는 회한이 밀려온다. 아니 한 사람의 얼굴에 웃음을 주는 그런 누워서 떡먹기만큼이나 쉬운 그런 일도 제대로 못하다니 참 안타까운 삶을 살았구나 회한이 앞선다.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 아니면 나빠졌습니다?”라는 질문 앞에서 오로지 쥐구멍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야만 한 나의 모습을 본다.
언젠가 내가 살고 있는 지역 <볼티모어 선>이라고 하는 일간지가 한 번은 신문 독자들에게 이런 설문을 낸 적이 있다. "만약 당신이 1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1년 동안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수 천명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대답은 딱 두 가지로 요약이 되었다. 첫째는,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더 많이 사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설문 응답에는 새 집을 장만하겠다든지,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을 하겠다든지, 멋진 새 자동차를 구입하겠다든지, 돈을 더 많이 저축하겠다든지, 출세를 위해 더 매진하겠다든지, 명예와 명성을 더 높게 쌓겠다든지...이런 세상 적인 서원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잘 산다는 것 또 성공의 삶을 산다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고 난해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갈까?”알고도 모를 일이다.
불현듯 정호승 시인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의 넋두리에서 ‘인생은 나에게 술을 사줘도 너무 많이 사줬다’라고 대답할 한 해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은가? 올해에는 유난히 내 주위에는 ‘성공의 삶’을 살아간 주인공들이 많았다. 하늘의 별따기라는 딱 한 사람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던 사람들이 주위에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많았다. 대한 민국의 자랑 서러운 아이돌 그룹 세븐틴의 민규라는 젊은이가 유네스코 총회의 청년포럼에서 감동의 삶을 증거 했다. 데뷔 다음 해에 처음으로 정산을 받았던 날 비록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일을 꼭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마침내 아프리카 탄자니아 어린이들에게 멤버 이름을 딴 13마리 염소를 선물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선물을 받았던 한 아프리카 아이들로부터 ‘꿈을 위해 염소를 잘 키우겠다’는 편지를 받고서 “한 사람을 바꾸고, 그 사람의 꿈을 확장시키며,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외친다. 분명히 그들에게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 아니면 나빠졌습니다?”라는 질문을 한다면 돌아올 답은 뻔하리라 확신한다.
내가 아는 한 젊은이가 있다. 참 가난한 가정에서 아버지 부재에서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수많은 세상의 것들이 유난히 그에게는 요원하기만 했었고 가장 화려한 ‘사치품’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행복한 가정이 되는 요소들이 절대 부족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흙수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의 운명이고 팔자이었던 것이다. “쥐구멍에도 별이 떤다” 아니면 “개천에서 용이 난다”라고 해야 할지 그가 직장에서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AI 인공지능의 대가가 되었다. 연말 직무수행평가 (Job Performance Evaluation)에서 탁월한 업무 평가를 받아서 특별 보너스를 받았다. 그러면서 상관이 “앞으로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쓸모없는’ ‘ 중복되고’ 또 ‘불필요한’ 자리를 감축을 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상관에게 자신은 특별 보너스가 필요가 없으니 자신에게 줄 돈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선처를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왠지 그 녀석의 얼굴에는 섭섭함이라든지 안타까움은 없었고 입가에 잔잔하고 흐뭇한 미소만이 번지고 있었다. 돈이라면 맥을 못추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은 이런 친구를 보고 하는 말이구나 싶다. 그 녀석이 삶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는 말씀을 증명하고 증거 한 것이다. 내가 이루게 될 성공은 결코 나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함께 복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나의 젊은 친구가 보여준다. ‘공부해서 또 성공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우리들의 삶의 나침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또 성공해서 남 주자’가 우리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말입니다. 이 젊은 친구는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 아니면 더 나빠졌습니까?”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할지 생각만 해도 좋다.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러니까 팬데믹이 시작이 되기 전에 결혼할 남자 친구와 함께 만남에 출석하곤 한 학생이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을 하고 꿈이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학생을 보면서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뭔가 얼굴에 근심 걱정이 꽉 차있는 그런 학생이었다. 뭔가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뭔가가 그녀의 삶은 전전긍긍의 삶이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그 무엇은 마침내 두 젊은이들의 결혼식 리허설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 할 결혼식 리허설날은 마치 삼류 드라마 아니면 막장 그 자체이었다. 리허설 순서 하나하나가 한 번도 그냥 원만하게 순조롭게 지나가지 않았고 모든 참가자들의 진을 빼는 아수라장 일보직전이었다.
그 난장판의 엉망진창의 현장의 주된 이유는 가족 간의 알력이었다. 아버지는 한 사람인데 엄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세사람 이었다. 나아준 엄마, 십 대부터 대학까지 공부를 시킨 둘째 엄마,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법적 아내로서 살아가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입장순서에서부터 탈이 난 것이다. 누가 제일 먼저 들어갈 것인가. 결혼 주례를 하면서 처음으로 신부가 제발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하는 순서를 빼달라는 황당무계한 부탁을 했다. 절대로 자신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약일까? 5년 만에 2주 전 3개 주에 있는 한인 청년들의 체육대회가 있었다. 너무나 뜻밖의 얼굴을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고집이 센 그 아가씨가 이제는 의젓한 엄마가 되어서 선수로 참가한 남편을 따라온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엄마라 그런지 참 얼굴 표정이 밝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아이를 남에게 맡길 수가 없어서 그렇게 원했던 학교 선생직을 사표를 냈다는 이야기에 내가 용기를 내어서 “참 얼굴이 밝아 보인다”라면서 농을 걸어 두 부부를 웃게 했다. “전과는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잖아요?”라면서 감춰뒀던 속내를 터트렸다. 자신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자신의 아들에게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 가정사를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큰 용기를 내서 그토록 저주했던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버지를 용서한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자신도 왜 그때에 그렇게 막무가내, 천방지축, 안하무인 격으로 또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는지 몰랐다고 했다고 한다. 그녀는 분명히 내 사전에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품격 높은 용서로 한때 그녀가 이 땅에 존재했던 것으로 인해 다른 한 사람이 웃을 수 있게 하였으니까.
이제 내가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차례이다. 나이 칠순을 바라보면서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다. 산전수전 그리고 공중전의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의 부와 사회적인 명예을 누렸던 ‘성공’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잠시이었고 끝이 없었던 수천 리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이제 끝이구나”라고 느낀 적이 훨씬 더 많았었다.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루 한 끼 먹기를 걱정하며 비참한 삶을 살았던 적도 있었지만 오늘 이렇게 ‘한때 내가 이 땅에 존재했던 것으로 인해 단 한 사람이라도 웃게 하였고 또 행복해지게 했다’는 착각이라도 할 형편이 되었으니 “올 한 해가 작년 해보다 더 나아졌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어서 참 고맙기만 하다.
특별히 끊임없는 우리 사회의 금수저와 흙수저 그리고 갑과 을의 갈등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많으나 웃는 사람 한 사람을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힘든 세상임을 깨닫지 않았나. 삿대질과 손가락질 또 '내로남불'과 '귀 막고 아웅, 눈 감고 아웅 하는'식의 정치판도는 가뜩이나 풀 죽고 귀 죽은 민초들이 울 거리는 많으나 웃을 거리는 눈을 닦아도 찾을 수 없는 세상이다. 그래도 이 땅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웃을 수 있게 할 만큼이나 ‘성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니 이게 도대체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년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 해만큼만 ‘성공’한 한 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