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인내, 견딤
나는 슬하에 30대 후반, 30대 중반 그리고 20대 후반의 아들 3명을 두고 있다. 나는 자녀들을 보면서 기절초풍 수준에 달하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바로 자식에게 주어진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숙명은 부모를 닮는다는 점이다. 더 정확하게 직설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부모의 나쁜 점을 귀신같이 꼭 빼어 닮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녀들은 부모의 거울이고 그림자라고 했지 않았나 싶다. 부전자전이라고 유난히 내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춘기’의 유난히도 별난 ‘성장통’을 그대로 닮았다. 언젠가 40~50대 가장에게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갱년기 아내와 사춘기 아이의 전쟁'이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중2병’이고, 그리하여 거리에서 ‘중2’를 만나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거나, 북한이 남침을 못 하는 이유가 남한의 ‘중2’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이니 아이들의 사춘기 ‘성장통’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이었는지 알 것 같다.
언젠가 존경하는 김형석 교수님,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경리와 박완서 선생님들께서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인생 황금기는 60~75세입니다”라는 말을 하셨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심정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을 해보았다. “나도 절대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내 아이들의 사춘기 때에 내가 벌였던 혈투와 사투는 살아생전 딱 한 번으로 족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자녀들을 키우다 보면 ‘반항기’ ‘사춘기’라는 ‘성장통’을 겪는다라고 사전에 귀띔을 했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멋도 모르고 철없이 세 사춘기 아들들 교육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웃집 또래의 아이들은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적적 무난히 별 탈없이 사춘기를 잘도 보내기도 하지만, 내 아들들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과 충동 속에서 아슬아슬한 사춘기를 보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춘기 ‘성장통’이라는 고질병에는 신통한 약이 없더라. 한번 매를 맞아본 사람은 안다. 그 옛날에는 천방지축 모르고 부모가 되었기에 그 역할을 그런대로 감수했지만 다시 그 길을 가라면 못 갈 것 같다. ‘사춘기’ 성장통이라는 그 어마무시한 시절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그 시절을 이겨내고 견디고 자식들과 철천지원수가 되지 않고 지금까지 왔는지 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내 큰 아들은 지금 30대 후반의 나이로 전형적인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그럼 평범한 삶이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꿈만 같은지는 큰 아들의 사춘기 시절을 기억하면 더 실감이 난다. 보통의 부모들은 시큰둥할 수준의 삶이지만 나에게는 가끔 일어나면 꿈인가 생시인가 내 허벅지를 꼬집어 볼 정도로 어마어마한 장족의 발전이다. 나는 큰 아들을 키우면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녀석의 앞날이 오늘 같은 평범한 날이 절대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아들을 대할 때마다 짙게 낀 먹구름만 보이고 있었다. 자식의 미래에 먹구름은 굉장한 전염성을 가졌다. 아버지인 나의 미래에도 먹구름에 쌓었다. 아들의 유별난 사춘기 ‘성장통’은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이었고 출구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동굴 갔았다. 보통의 학생들은 학창 시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경험이라는 교장 선생님 사무실에 불러가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학교 버스를 못타게 하는 극단의 조치가 내려지고 할 수 없이 학교로 아버지가 데려다주어야만 했었다.
자식이 방황하면 부모는 제일 먼저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으이구, 내 팔자야” 하면서 바위에 머리를 처박고 신세타령하기가 일쑤이다. 절대로 내 자식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단언하였던 정학처분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다행히 한 학년 동안 3번 이상 정학을 받지 않아서 간신히 고등학교를 제때에 졸업을 하고 대학을 들어가게 되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졸업식날 기쁨보다는 십년감수를 했다는 기분이었다. 대학을 들어가면 좀 변하겠지 하는 막연하기 짝이 없는 희망도 잠깐이었고 곧바로 집을 뛰쳐나가서 2년 동안 아들 얼굴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었다. 자녀들을 가진 부모라면 자식이 집에 없으면 좌불안석이 된다. 전전긍긍 그리고 불안초조해서 잠을 못 자는 것이다.
내 자식이 이유 없이 바깥을 배회할 때에는 야밤이나 대낮에 소방차나 앰뷸런스 소리가 나면 그냥 일어나서 아무 데서나 땅에 웅크리거나 주저앉아서 두 손 모아 기도를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혹시라도 저 앰뷸런스나 소방차가 내 아들을 싣고 가고 있지는 않나라는 노이로제에 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 첫째는 대학을 5년 다녔지만 빌린 학자금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대학을 끝내 졸업을 못했다. 둘째도 첫째를 고대로 닮았기에 같은 전철을 밝았다. 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이하동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남보다 더 오래 대학을 다녔지만 대학졸업장은 겨우 딸 수가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처음 들어간 4년제 대학을 학업부진으로 쫓겨나 2년제 대학으로 가서 훗날 다시 4년제 대학을 재입학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미국에는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 아이를 그냥 쫓겨내지 않고 반드시 부모가 동석하는 가운데 왜 학교에서 그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그리고 부모 앞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재입학을 할 수 있는지 설명회를 가졌다. 자식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릴 형편이 아니라 입학 담당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통사정을 한 것이 아직도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셋째도 비슷한 길을 갔다. 4년제 대학에서 쫓겨났고 또 2년제 대학에서 두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후애 비로소 졸업을 하였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다. 바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라는 말이다. 아마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는 말이지 않나 싶다. 또 어떤 이는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라는 말도 한다. 부모가 하는 것을 자식이 그대로 따라서 한다는 말이지 않나 싶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나는 무조건 둘 다 싫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둘 다 자식은 부모를 그대로 따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격세지감이라고 할까 아니면 세월이 약이라고 할까, 지금 3 아이들은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젊은이들처럼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남보라는 듯이 그런 수준은 아니지만 그냥 큰 걱정시키지 않고 나름대로 잘 산다. 그래도 아들들의 현주소가 나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고 기적이다. 큰 아들은 중소기업 건설회사에서 중견간부로 일하고, 둘째는 중소기업 수준의 투자 회사에서 재정담당 부사장으로, 그리고 막내는 존스 홉킨스 응급실에서 간호사로 있으면서 마취 의사 공부를 하고 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 아들들 3명에게 참 많은 나의 청춘과 중년기를 보냈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누가 나에게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정의를 내리라 하면 드리는 이야기가 있다. 환온이라는 진나라 장수가 촉이라는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에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쯔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이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바로 그때에 우연찮게 한 병사가 배회하고 있었던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오게 되었다. 그러자 어미로 보이는 원숭이 한 마리가 새끼가 잡혀간 배를 쫓아 무려 40여 킬로미터를 강기슭을 따라서 배를 쫓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협곡에서 배가 속도가 늦어지는 틈을 타서 어미 원숭이가 새끼가 있는 배를 향해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어미원숭이는 숨이 너무 차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봤더니 창자가 토막토막 다 끊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새끼를 빼앗기고 나서, 어미가 애간장이 녹는 마음으로, 새끼 원숭이를 찾으려고 달려왔는데,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이미 장이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단장'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딸과 아들의 조합을 두고 ‘금메달’ ‘은메달’ 또 ‘동메달’ 부모라고 구별한다고 한다. 나는 세상의 잣대로 하면 3 아들을 가진 ‘목메달’ 아버지이다. 그만큼 자식 때문에 애간장이 타고 단장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에게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는데 어딜 가나 자식 농사에 관한 이야기는 함구령을 내린다. 내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그만큼이나 껄끄럽고 불편하고 또 가장 뜨거운 감자이었고 금지된 주제이다. 그런데 왜 오늘 자식 이야기를 할까? 팔불출 아니면 내 얼굴에 침 받는 그 짓을 내가 왜 자청할까? ‘모든 좋은 것은 다 빠짐없이 애간장이 타 들어가는 기다림’의 결정체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자녀들과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어마무시한 힘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던 적이 없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이 시대가 자랑하는 최고의 영성가 헨리 나우웬 박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헨리 나우웬이 어느 날 독일에서 유명한 서커스단의 곡예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그네를 타고 날아다니는 공중곡예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헨리 나우엔은 점점 연습하는 서커스단원들과 친해지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날,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단의 단장에게 그동안 자신이 궁금해하던 질문을 하나 던지게 된다. 그것은 어떻게 이쪽 공중그네에 있는 사람이 날아서 반대편 공중그네에 있는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느냐고,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랬더니 서커스 단장이 대답하기를 거기에는 큰 비밀이 하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공중곡예의 비밀은 날아가는 사람(flyer)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잡아주는 사람(catcher)이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중에서 날아가는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지만, 사실 진정한 주인공은 잡아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날아가는 사람은 단순히 손을 펼쳐서 상대방이 자기를 잡아서 올려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최악의 사태는 날아가는 사람이 잡아주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할 때 벌어진다고 한다. 만일 날아가는 사람이 잡아주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으려고 하면 잡아주는 사람의 손목이 부러지거나 아니면 날아가는 사람의 손목이 부러지기 십상이고, 그러면 양쪽 모두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커스 단장은 말하기를, “날아가는 사람은 단순히 손을 앞으로 뻗으면서 잡아주는 사람(catcher)이 자기를 위해 올 것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왜 이 이야기가 내 힘들었던 나에게 그토록 큰 희망의 밧줄이 되었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덕이고 있었던 나에게 만남의 기다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때부터 나는 내 지혜와 능력의 영역을 떠났던 내 아들들이 언젠가는 좋은 만남을 가지도록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후 나의 삶은 조금은 단순해졌다. 방황하는 아들들의 미래에 그들의 손을 잡아줄 그런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들은 좋은 삶의 동반자를 만났다. 자신들보다 훨씬 더 인내심과 똑똑함을 가진 아가씨들과 가정을 꾸미게 되었다. 아버지의 손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손을 잡았던 것이다. 부족한 아들들의 손을 잡고서 좋은 길로 인도하는 반려자를 만난 것이다.
나는 항상 아들들에게 “만약에 너희들이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둘러가도 되는 재기의 기회가 가능이나 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확신이 없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남자에게 대학을 나온 어떤 여자가 시집을 올까? 또 2년제 대학을 졸업한 ‘과거사’가 있는 자에게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의 신분상승을 막는 무형의 장벽을 뜻하는 유리천장(glass ceiling) 차별은 없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내가 그 환란 속에서도 뼈를 깎는 처절하고 간절하고 절실한 기다림의 순간을 가진 것에 감사할 뿐이다. 지금은 먹구름 사이로 살짝 보이는 햇빛에 감사할 뿐이다.
언젠가 지금은 모든 ‘내 노라’하는 tv쇼들을 섭렵하면서 인생의 제2의 성공을 즐기고 있는 안정환 전 국가 대표 축국 선수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 기억이 난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월드컵에서 한 경기 초반 페널티킥을 실축했을 때이었다고 했다. 만약 그때에 히딩크 감독이 그를 곧바로 도중에 교체했다면, 연장 경기 후반의 그 기막힌, 세계를 흔들어 놓은 가히 역사적인 골든골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오늘의 안정환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응원단의 큰 실망과 일부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히딩크 감독은 그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 주었기에 인생의 대역전의 발판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믿고 기다려 주는 마음, 그것이 힘입니다. 기다려 보는 힘이 기적과 신화를 만듭니다. 물론 요즘 젊은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정보도 빨리 얻고 더 빠른 속도로 주어진 일을 해치워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디지털 시대, 인터넷 시대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바로 기다릴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옛날 아날로그 시대를 경험했던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미덕인 줄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요즈음처럼 인터넷도, 이 메일도, 핸드폰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우편으로 오가야 하거나 내가 직접 현장에 가봐야 하는 시대였지요. 어디 좋은 소식이라도 올라치면 우체부 아저씨가 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렸습니다. 청춘 시절 연애를 할 때도 그랬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다방이나 카페에서 만날 약속을 하다가 바람을 맞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다섯 시간, 혹은 열 시간씩 무조건 기다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요. 요즈음 아이들한테 이런 말을 하면 마치 ‘외계인’인가 이상한 눈치를 주곤 합니다. 못 간다고 문자 메시지 하나만 날리면 끝날 것을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런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날로그 시대의 선배가 드리는 이야기가 있다. 한 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사냥을 즐겼던 대왕은그런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날로그 시대의 선배가 드리는 이야기가 있다. 한 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사냥을 즐겼던 대왕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습니다. 달아나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왕은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볼품없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없는 사냥개들을 내가 모두 죽여버렸다."
친구는 대왕의 말을 듣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대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값비싼 개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알렉산더 대왕은 땅을 치며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이라는 후회막심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일생일대의 가장 위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조급함과 성급함으로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값비싼 개들을 죽이고 있지는 않나요? 답을 하기 전에 자녀들, 남편들, 아내들, 직장의 상사 그리고 동료들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을 먼저 그려보시면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