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스톡데일 역설, 냉철한 현실
살다 보면 가끔 어쩜 저렇게 속이 시원하고 후련하다 할 만큼이나 내가 꼭 언젠가는 하고 싶은 말을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절대로 불가능하리 만큼이나 군더기 또 군살하나 없는 간단명료함으로 시대의 문제를 ‘정조준’하는 혜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당면한 문제는 다름 아니라 ‘4가지의 부재’ 즉 ‘불러야 할 노래’, ‘흔들어야 할 깃발’, ‘따를만한 지도자’, 그리고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만한 신조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하버드대학 전 총장 나단 파시(Nathan Pasey)가 그런 ‘탁월함’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한마디로 이 ‘4가지의 부재’를 집약하자면 결국은 ‘본’이 될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하버드대학 전 총장 나단 파시는 나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한 귀한 사람이다. 나는 이민 2세와 3세들에게 ‘따를만한 지도자’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본이 되는 인물들을 강추하는 일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 여긴다. 그리고 그 길 선상에서 발버둥을 치는 사람이다. 올해도 한 해의 끝자락에서 젊은이들에게 ‘스톡데일 페러닥스 (Stockdale Paradox)’라는 말을 남긴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 장군을 소개한다. 그는 베트남 전쟁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8년 동안 '하노이 힐튼'이라 불린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의 ‘90cm x 275츠’ 독방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온갖 가혹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했던 미군 최고위 장성이다. 온갖 육체적 폭행, 채찍질, 질식 고문은 예사에 정신력을 시험하는 무자비한 정신력 고문까지 당했지만 일부 포로들은 미국의 전쟁범죄를 인정하면 관대하게 대접해 주겠다는 월맹 측의 회유에 넘어가기도 했지만, 그는 이토록 시리고 아픈 시련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8년 내내 꿋꿋이 버텨내었던 입지적인 인물이다.
마침내 1973년 미국이 마침내 베트남에서 병력을 철수하기로 하면서 그는 석방이 되었는데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고 마른눈으로 그를 본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화면에 보였던 그는 40대 중반에도 웬만큼 중후한 미중년이었던 외모는 온데간데없었고 8년이라는 고된 수용소 생활로 몰골이 다 되었었다. 장장 8년이라는 포로 생활동안 북베트남인들로부터 받았던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마비되어 평생 장애를 갖고 살게 되었다. 훗날 감옥에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스톡데일은 의회 명예 훈장을 가슴에 다는 최초의 3성 장군이 되었고 1992년 미국 대선에서 강력한 '다크호스'로 부상했던 ‘로스 페로’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었다.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결정적인 동기가 있었는데 바로 짐 콜린스의 저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에서 그를 소개하면서부터이다. 그의 명불허전의 영웅담을 본 많은 미국인들은 그것이 알고 싶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스톡데일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만이 가졌던 그 생존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스톡데일은 ‘결국에는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수용소라는 냉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자신이 살아남은 비결로 꼽았다. 그는 “결국엔 이기겠다는 믿음과 현실의 가장 가혹한 사실들을 절대로 혼동하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바로 ‘스톡데일 패러독스’라는 핵심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처한 비관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면서도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면 반드시 장래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낙관주의이다.
그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근거 없고’,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으며’ 또 ‘대책 없었던’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냉철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낙관주의자들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마침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렇게 되지 않자 부활절에는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근거 없는 희망만 품다 결국에는 상심해 죽어갔다고 한다. 반면, 현실주의자들은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아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훗날 그가 미국 해군사관학교 후배들에게 했던 “It will become much worse before it became better” 즉 “상황이 나아지기 전에 훨씬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잠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교훈이 되었다.
강한 희망과 믿음은 가지되,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라는 ‘스톡데일의 역설’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플랭클(Viktor E. Frankl)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그는 유대인 정신과 의사로 2차 대전이 터지자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아내는 수용소에서 죽거나 가스실에 보내졌다.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암흑의 시간 동안 그가 살아남은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빅터 플랭클에게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던 한 동료 유대인 외과의사의 예를 주시할 필요가 있는데 하루는 그의 동료 닥터가 밝은 얼굴로 프랭클을 찾아와 꿈 이야기를 하였다. “추수감사절에 연합군이 진격해 와 석방되는 꿈이었다”라며 기쁨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 추수감사절이 되었음에도 연합군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그 동료 닥터는 프랭클을 찾아와 크게 낙심을 하며 “다 틀렸어. 다 틀린 거야! 헛된 꿈이었어”라고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심하게 열이 오르더니 점점 눈에 띄게 약해졌고 식음을 전폐하고 밥을 먹지 못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삶의 의욕을 점점 잃어 얼마 가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에는 죽었다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주어진 환경보다 근거 없고, 허무맹랑하고, 또 얼토당토 하지 않은 희망이야말로 인간을 병들거나 죽게 만드는 요소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동료의사의 죽음을 반면교사로 삼아 빅터 프랭클은 냉철한 현실 앞에서 어떤 강제노역의 순간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친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곤 했고 또 흙 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가지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하기 시작을 했다고 한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는데 나치스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스들은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스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 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렸던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그렇다. 이렇듯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긍정은 미덕이라고 할 수 없다. “정확한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근거 없는 긍정은 죽음의 독약이다”라고 미국의 경영 전문가 짐 콜린스(Jim Collins)의 외침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언젠가 칠레의 산호세 광산 지하 약 700m 지점에 매몰된 광부 33명의 갱도매몰 사고이다. 광산이 무너져 지하에 갇혀 있어야 했던 이들은 69일 후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모두 구출되었다.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이들을 무려 69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버티게 하고 결국에는 다 살아 돌아오게 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목표는 최고를 지향하되 계획은 항상 최악을 가정하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또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명언인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를 남긴 나폴레옹도 부하들에게 항상 부하들에게는 “반드시 이긴다”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막상 작전을 세울 때는 치밀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한다. 위험과 불리한 조건을 일부러 과장되게 평가해 질문하고 또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고 한다.
작은 거인 나폴레옹의 “작전을 짤 때는 ‘겁쟁이’가 돼야 한다”는 말은 바로 스톡데일의 미래는 낙관하되 현실에 대해서는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는 ‘합리적 낙관주의’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너무나 적절한 교훈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든, 자영업자이거나 기업의 경영주든, 혹은 국가의 지도자이든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하지 말고 긍정적 사고의 틀로 무장해야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이나 험란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당연히 힘들기만 한 삶의 현장에서 긍정적인 자세라도 없으면, 위험을 무릅쓰며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또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낙관적 생각은 오히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말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교훈이다.
오늘 글의 재목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는 아르헨티나의 촉망받는 의사 출신으로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던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 체 게바라의 어록에서 퍼온 말이다. ‘대혁명’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갖데 또 한편으로는 리얼리스트로 살아야 한다는 이 시대의 걸세출의 혁명가의 외침이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불러야 할 노래’, ‘흔들어야 할 깃발’, 또 ‘따를만한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은 뭘 보나1960-70년대 전 세계를 강타했던 게릴라 혁명의 열기는 사그라들었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가 게바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아마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젊은이들은 게바라의 유명한 경구인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는 말을 가슴에 담아야 하리라 믿는다. 또 게바라의 어록의 다른 반쪽인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말도 가슴에 와닿기를 소망해 본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원대한 꿈을 꾸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나 그 원대한 꿈이 현실로 자리매김을 하는 길은 냉정한 정신과 열정적인 정신의 적절한 균형에서 비로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함도 강조한다. 나는 늘 막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는 젊은이들에게, 비록 잔치집에 재를 뿌리는 모양새로 보이기도 하지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합하여 한 가정을 세우는 것은 노래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비록 마음 아픈 일이지만 기대는 하되, 당장의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새로운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인 응원을 마다하지 않는다. 단지 당부하기는 무조건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목표와 비전에 눈이 멀어서 너무 ‘지나친 낭만’ 또 ‘얼토당토 없는’ 기대감은 금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꿈과 이상은 젊음의 상징이니 누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조건 ‘그렇겠지’라는 막연하기 짝이 없는 생각만으로 무엇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제발 부탁이다. 결혼을 하던지, 유학을 하던지 아니면 사업을 하던지 ‘생각만큼이나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결혼이던 사업이던 우리가 가는 길에 모두 꽃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꽃길보다는 가시발길, 자갈길, 돌길 그리고 진흙길이 더 많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꽃길만 걷겠다고 작정하고 가다가 힘든 길을 만나면 실망하게 되고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것을 수도 없이 봐야 했었다. 애당초 꽃길만 걷겠다는 허황한 꿈을 버리는 것이 좋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라는 말이 있다. 매달감의 올림픽 선수는 경기 전 꿈을 꾸면서 젖 먹던 힘을 다해서 그 꿈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받친다. 그러나 부푼 꿈과 함께 냉정한 현실감도 가진다. 내가 경기장에서 만나는 적은 나보다 훨씬 더 강한 훈련에 매진했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항상 머리에 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큰 시험을 앞둔 학생들은 밤을 새면서 최선을 다하여 준비를 한다. 자신감을 가진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시험에는 자신이 미처 공부하지 않았던 곳에서도 문제가 출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사람이 ‘진정한’ 학생이다. 지나친 방심은 금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항상 건강한 긴장으로 무장을 하는 것이다.
내가 젊은이들에게 가장 강추하는 시대의 명작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에는 한때 촉망받던 은행 부지점장 ‘앤디(팀 로빈스 分)’가 어느 날 아내와 그 애인을 살해했다는 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감옥 생활 초창기에서 앤디는 비록 자신이 강력범들이 수감된 감옥에서 지금은 짐승 취급 당하지만 조만간 누명이 벗어져 풀려날 것이라는 참으로 막연하고, 참으로 천진난만하고 또 참으로 낭만적인 생각을 가진다. 그러다 자신이 처한 교도소의 현실을 간파하면서 더 이상 막연하였지만 그에게 실마리 같았던 희망은 사라지고 이제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직시하게 된다. 보통사람이라면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앤디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더 이상 막연한 희망 하나에 자신의 운명을 걸지 않고 냉철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거대하고 치밀한 탈출 계획을 세운다. 그 몇년 동안 매일 숟가락으로 교도소의 벽을 긁어내는 ‘숟가락 탈출기’라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꾸민다. 그리고 자유를 향해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악취가 나는 오물로 가득 찬 500야드를 기어 탈출에 성공을 한다. 500야드라는 거리는 미식축구 경기장 다섯 채를 이어 붙인 거리이다. 물론 반마일 조금 못 되는 거리지만 악취 나는 오물로 가득한 500야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거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 영화의 압권적인 명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앤디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억수같이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 달랑 숟가락 하나로 판 땅굴로 감옥을 탈출하고 두 팔을 활짝 펴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르는 환호성 장면이다. 그 앤디의 환호성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미래의 환호성 지르는 모습과 오브랩을 하게 된다. 그 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만이라도 나는 생시라고 철석같이 믿고 싶다. 왜냐하면 앤디처럼 우리 젊은이들 당신들도 ‘보통사람’이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