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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로부터 아기 예수 구하기

진정한 성탄의 뜻

by Joung park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가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되어 내 안방의 스크린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물간’ 영화로 생각했는데 여전히 보는 사람의 마음을 여지없이 격동시키고 후벼 파는 마력은 세월의 흐름에 조금도 빛바래지 않았다. 영화의 역사적인 배경은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다.


끔찍하고 처참한 참호전은 극심한 생명 소모전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그 결과로 이미 금쪽같은 수백만 명의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전쟁의 향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고 전쟁이 점점 장기전 양상을 보이며 교착 국면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벼랑 끝으로 몰린 독일에서는 온 나라가 국가의 위급존망을 호소하며 전 국민에게 맹목적 애국심 고취감을 강요하게 되었다. 마침내 강압적, 억지적 또 등 띠 밀기씩의 군 ‘자원입대’의 열풍이 온 나라를 집어삼키고 마침내 조그마한 동네의 19세의 어린 소년 파울 역시 광적인 분위기에 휩슬리게 된다. 물불을 가리지 않게 만들었던 젊음의 혈기가 하늘을 찌르고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만다. 부모님 서명을 대충 흉내 내면서 까지 입대 지원서를 작성하고 파울은 ‘어쩌다’ 신병이 되어 서부 전선으로 향한다.


‘얼떨결’에 보내진 전선에서, 휴머니즘과 행복을 꿈꾸던 순진천진난만하기만 하였던 19세 파울과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의 모습은 전선에 배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하루에도 수차례 같은 나이 또래의 동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해야만 하는 참혹하고, 처참하며 또 폐허뿐인 전선에서 ‘인간성’이 설 자리는 전혀 없고 말았던 것이다. 또래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었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오랜만에 치열했던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그날따라 날씨는 쾌청하기만 하였다.


총성이 잠시 멈춘 그 틈을 타 어디에선가 날아온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파울의 눈동자들도 저 멀리서 날고 있는 나비를 쫓다가 마치 찰나적으로 19세 소년의 동심이 자극을 받았는지 참호에서 몸을 일으켜 나비에 손을 내밀어 보았다. 그런데 그만 바로 그 순간에 저격병의 총알이 소년 파울의 가슴을 정조준하여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얼떨결’에 전쟁에 참가했었던 19 세의 어린 소년 병사 파울이 그렇게 사망을 한 것이다. 19세의 소년 파울 보이머가 죽은 그날은 온 전선이 너무도 평온하고 조용하였으므로 사령부에서는 본국에 짧고 명료한 군사보고서 전문을 보냈는데 "서부전선 이상 없다"가 다 이었다.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은 단지 숫자로 집계되고 기억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숫자로 기억하기를 거부하게 한다. 영화의 압권적인 메시지는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비록 영화는 끝났지만 그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영화는 우리들에게 “과연 당신이 살아 있는 영혼의 소유자라면 한 젊은이가 죽어가는 사건을 어떻게 ‘아무런 이상 없다’라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보이는 그렇게 짧고 명료하게 아무렇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느냐?”라고 항변하게 한다. 19 세라는 한 어린 소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그렇게 쉽게 너무나 당연하게 ‘이상 없음’이라고 어물쩍, 얼렁뚱땅, 은근슬쩍 그리고 대충 얼버무리다 넘기고 마는 그런 무정한 나라를 위해서 왜 귀한 어린 생명을 받치라는 말인가? 영화는 끝나고 말았지만 그 질문은 내내 나의 마음을 억누르고 또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다.


오늘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의 캐럴이 만천하에 울려 퍼져야 하는 성탄절의 계절이다. 어떤 영문인지 몰라도 누군가가 이 성탄의 계절에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영화를 언급하는 그 자체가 실례, 결례 그리고 참으로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당연히 이런 불만의 소리가 들릴 수 있다. “아니 왜 오늘 같은 기쁜 날에 하고 많은 성탄절 영화들 중에서 하필이면 암울하고 참담하기만 한 주제의 영화를 보나요?” 내 나름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니라 내 마음이 전혀 성탄절을 맞고 즐길 분위기가 아니다. 아무리 두 귀를 솜으로 꼭꼭 틀어막고 두 눈을 감아도 매일같이 쏟아지는 십, 백, 천을 넘나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사상자 통계 소식은 이제는 모두가 감각마저 무뎌지는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마치 세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푸틴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크라이나를 향하여 전쟁 사상 최고의 미사일 세례를 퍼부었다. 또 하마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중동에서는 전대미문의 잔인하고 혹독한 전쟁으로 무고한 사람들 특별히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날씨조차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초를 치는 모양새이다. 와이트 크리스마스는 제쳐 놓고서라도 잠시라도 개인 (dry) 날을 허락했으면 좋겠는데 때 아닌 홍수로 세상이 물난리를 맞고 있다. 또 하필이면 왜 이 ‘기쁜’ 절기에 앞날이 창창하기만 하게 보였던 그 유망한 젊은 배우는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했을까? 그 길 밖에 없었을까? 젊은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남의 일이 아니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왠지 세상이 참 뒤숭숭하기만 하고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다. 휘청거리는 내 마음을 그냥 단순하게 ‘미성숙’ 또 ‘철들지 않음’으로 얼른 뚱땅 지나치기에는 너무 내 마음이 무겁다. 성탄절 하면 누구나 한 번쯤은 무심코라도 내뱉어보는 ‘화평’, ‘평화’, 그리고 ‘기쁨’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어떻게 맨 정신으로 ‘이상 없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그냥 무심코 생각 없이 세상에 휩쓸려 가면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심정으로 세상이 아무런 ‘이상없음’이라고 대충 넘어가는 것이 어불성설, 언어도단이고 또 눈감고 아웅하는 꼴로 보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아직 나는 그런 매정함과 무정함에 내 영혼이 함몰이 되지는 않게 보여서 고맙기만 하다.


성탄의 날에 내 주위를 벗어나 다른 세상에서 내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는 이야기가 있다. 이웃나라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구었고 출렁출렁 들썩이게 했었던 도마뱀 이야기이다. 1964년 어느 날 올림픽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이 된 한 건물을 헐다가 인부들이 묘한 광경을 보았다. 다름 아니라 뒷다리에 못이 박한 채 벽에서 꼼작 못하고 있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 도마뱀의 뒷다리에 못이 박혔는가?’ 집중되었다. 인부들은 집을 짓던 3년 전에 박힌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마뱀은 3년 동안 못에 박힌 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모두 혀를 내둘렀고 이 신기한 일의 전말을 알아보기 위해 공사를 중단하고 도마뱀을 지켜보기로 했고 도마뱀을 관찰용으로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렸다. 고요한 적막을 깨고 모습을 드러낸 한 마리의 도마뱀이 카메라에 포착이 된다. 꼬리를 흔들며 나타난 그 도마뱀은 어디에선가 입에 물고 온 곤충을 대못에 박힌 도마뱀 입에 넣어 주는 것이 아닌가! 이 광경을 보는 일본 열도의 시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얼마 후 또 한 마리의 도마뱀이 나왔다. 입에 물을 물고 와 대못에 박힌 친구에게 물을 먹이는 장면이 아닌가! 생명수를 입에 넣어 주는 것이다. 눈물겨운 장면이다.


얼마 후 더 감격스러운 장면이 나타났다. 도마뱀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대 못에 박힌 도마뱀 등에 올라타 대못에 입은 상처 자리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 썩어 들어가는 대못 자리에 침을 약으로 바르는 것이다. 하필이면 왜 나는 이 기쁜 성탄절 계절에 도마뱀 이야기를 끄집어낼까? 왜 하필이면 이 즐거운 날에 ‘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황당하고 너무나 ‘엉뚱하고’ 또 너무나 계절의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이야기들을 할까? 세상이 황당하고 엉뚱하고 걸맞지 않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낱 미물인 도마뱀도 내 옆 ‘친구’의 아픔을 보고 그냥 미물처럼 ‘이상없음’이라고 은근슬쩍 넘어가지 않은 세상에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가 어떻게 ‘이상 없음’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보니 성탄절은 그렇게 위대하고 거창하게 보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조그마한 곳에서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보내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상 없음’에서 ‘이상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성탄의 진정한 정신 그러니까 2천 년 전 베틀레헴에서 행해졌던 오리지널 성탄절 원조를 이해하기 위해 오늘 나는 이 성탄절 주간에 시인 겸 성직자로 알려진 존 던의 (John Donne)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읊어본다. 순간적이나마 시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넘치는 양심의 소리와 함께 깊고 심오한 철학이 가슴으로 확 흡입됨을 느낀다. 더 나아가 도마뱀도 아는 그 성탄절날의 진정한 ‘인간성’을 내가 새삼 망각하고 있지는 않나라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시이기도 하다. "세상 어느 누구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 대양의 한 부분이다. /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 모래벌이 씻겨나가도 마찬가지다./ 그대와 그대 친구들의 땅이 쓸려내려가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서 울린다."


이 시의 진정한 가치는 이 시의 배경을 알 때에 비로소 깨닫게 된다. 존 던이 살았던 17세기 영국 런던에는 마을에서 사람이 죽으면 교회당의 종을 치는 그런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소리가 들리면 귀족들은 하인을 시켜 누가 죽었는지 알아오라고 시키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하인이 돌아와서 누가 죽었는지를 알려주면 귀족들은 그 이름을 듣고 장례에 참석할지 안 할지를 판단하는 고유의 관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애를 중시한 박애주의자 존 던은 이 시를 통해서 과연 무엇을 당시의 귀족들에게 말하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는 귀족들에게 당신의 하인의 죽음을 그냥 ‘이상 없음’으로 대충 얼버무리다 넘기고 말라는 권면은 아닐까 싶다.


당신도 죽음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음을 너무 늦기 전에 꼭 기억하라는 가슴에 타오는 진정한 사랑의 권면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언젠가는 귀족 당신 하인의 ‘이상 없음’의 죽음도 당신의 삶에 ‘이상 있음’이 되니 미리 준비하라는 권면인 것이다. 그러니 제발 너무 뒷짐 지고 태연하고 담담하게 또 무정하게 한 하인의 죽음을 너무 멀치감치에서만 보지 말고 네 발로 직접 뛰어나가 공동체의 손실에 대한 애도를 표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누구의 죽음이든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은 모든 인류 입장에서 보면 결국 손실이라는 존 던의 따뜻한 인류애가 뜨껍게 느껴진다.


이왕 내킨 김에 존 던의 ‘새 아침’의 일부도 읊어보자. “이제는 우리의 깨어나는 영혼들이 두려워하며 서로를 보지 않는 새 아침이 밝았소. 사랑은 다른 곳에 한눈파는 걸 싫어하고 아주 작은 방이라도 하나의 우주로 만드니까요. 해양탐험가들은 마음껏 신세계로 가라고 해요. 다른 이들은 지도로 딴 세상 가보라고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서로가 하나를 가진 하나의 세계를 갖도록 합시다.”이왕 내킨 김에 존 던의 성탄절 아침에 말씀도 기억하면 좋겠다. “그리스도는 전 생애가 수난 그 자체이셨습니다. 혹자는 순교자로 죽었지만, 그리스도는 태어날 때부터 순교자였습니다. 그가 누인 구유의 지푸라기는 연약한 아기에게는 찌르는 가시와 같았습니다. 딱딱한 구유의 나무 조각은 십자가의 괴로움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성탄절은 세상이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처럼 제멋대로 굴러가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상 없음’ 이 아니라 ‘이상 있음’이라고 단정하시고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날이다. 세상이 절대로 ‘이상 있음’을 깨달았기에 아무도 더 이상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지경에 도달하였기에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급파하신 날이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누추한 곳으로 말이다. 가끔 우리는 이 마구간 탄생을 잘 이해를 못 하고 있지는 않나 싶어 진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해본다. 언젠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언론에 발표된 기사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서울의 최상위 호텔의 객실인 로열 스위트룸에 머물었다고 한다. 이 객실의 1박 투숙료는 2200만 원인데 그 당시의 가치로 환산하면 $ 17,000정도이라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빈 살만 왕세자 일행을 보필하는 일행들을 위하여 무려 400실을 통째로 예약했다고 하니 그 천문학적인 숫자는 경악 수준이다. 방 하나의 인테리어 비용만 40억 원 이상이 들어갔다고 한다. 객실마다 2개의 침실과 응접실, 파우더룸, 드레스룸, 회의실, 홈바, 건식 사우나 등을 갖추고 있고 침실에는 시몬스의 최상위 매트리스와 이탈리아 고급 브랜드 가스탈디 제품 등을 준비했다고 한다. 객실마다 세계 3대 피아노 브랜드 C. 벡슈타인 그랜드 피아노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당 가격은 억대를 호가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객실마다 해당 층으로 바로 이동이 가능한 전용 엘리베이터가 준비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음을 고백한다. “야, 나는 그런 데서 평생에 하룻밤이라도 자 보면 여한이 없겠다! 언제 나는 그런 곳에서 한번 자볼까?” 갑자기 꿈에서 깨라는 외침과 함께 왕의 왕이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과연 하룻밤을 어디에서 묵으셨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마침 그곳은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사관마다 만원이었다. 결국 아기 예수는 마구간으로 갑니다. 당시 동굴로 된 마구간이 사관 근처에 있었을 텐데, 그 누추한 곳에 마땅한 자리가 없으니까 구유(여물통, 먹이통)를 침대 삼아 아기 예수를 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신 그분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마구간 구유 위에 나신 것입니다.


이제는 알았다. 성탄절은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탄절의 의미를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진짜 성탄절 지내는 일에 비로소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생일날에 우리가 좋아하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좋아하시는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아기 예수의 시각과 관점으로 세상을 살피면서 ‘이상 없다’ 또 ‘난 몰라’가 아니라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서 ‘이상 있음’을 발견하고 그 아픔에 내가 기꺼이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나 가능했었던 진정으로 눈물 없고 고통 없는 그리하여 ‘이상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성탄절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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