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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 재갈 물리자 일어난 일들

인내, 절제, 견딤

by Joung park

저에게는 그야말로 둘도 없는 ‘큰 바위 얼굴’ 같은 25년 지기 선배 한 분이 계신다. 그분은 세상의 잣대로 보면 이름만 언급해도 누구나 알아볼 만한 만한 그런 유명세를 떨치며 살아간 ‘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는 게 많고 학식이 풍부한 머리에 든 게 많은 ‘든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군중 속에 고독’이라고 주위에 사람들은 많지만 꼭 집어서 절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더문 시절에 그는 분명히 다수 속에 ‘격’이 다르고 또 ‘결’이 뭔가 다른 사람이다. 천리 밖의 친구의 허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안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천 리 밖의 친구의 애태우는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리안에 버금가는 귀를 가진 사람이다.


나의 생활이 순조롭고, 내가 잘 나갈 때에는 옆에 붙어 기생충처럼 살다가 내 삶이 생활이 어려워지고, 그리하여 자기에게 짐이 될 것 같으면 다 온데간데없이 감쪽같이 숨어 버리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지 않은가? 그래도 "친구란 그의 어깨에 나의 슬픔을 대신 짊어져 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세상에 각인시키기라도 하듯이 다른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리고 걸어 나갈 때 오히려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람이다. 주위에 힘든 사람들의 힘들고 그늘진 형편을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서는 남몰래 베푼 선행의 이야기들을 전해 듣노라면 그의 사람 ‘됨됨이’를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곧이 말하자면 ‘난 사람’, ‘든 사람’ 보다 ‘된 사람’의 이미지가 더 강하고 진하게 느끼지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그분은 말을 잘하는 능력보다 우선 ‘말을 잘 듣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항상 어딜 가나 ‘말하는 재미에 스스로 빠진’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남 말 듣는 재미에 푹 빠진 사람이다. 그분의 언행에서 진하게 묻어 나오는 아우라를 보면서 유행가 애모의 가사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데..”가 딱 어울리는 선배님이다. 그분에게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을 열기 시작을 했다. 참 대단한 ‘사건’이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고향을 떠나 미국에 살면서 도대체가 마음을 나눌만한 그런 친구를 사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었다. 그런 나에게 마음을 열고 진정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신 분이다. 처음 그분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 선배님은 늘 항상 걱정근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순풍에 돛 단 배처럼 매사가 순조롭고 평화롭게 잘 풀리는 분이라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은 자식농사, 부부농사, 그리고 심지어 커리어 농사도 잘하신 분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남을 향한 배려심과 여유로움이 남다른 분이다.


그런데 그 선배님에게는 남이 잘 모르는 남다른 눈물의 고통이 있었다. 어느 날 꼭꼭 숨겨진 비밀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 있었다. 노래 ‘애모’가사보다 훨씬 더 나를 작게 보이게 했었던 순간이기도 하였다. 언젠가 신년하례회를 가졌는데 그날 모든 사람들에게 덕담을 전하시기로 예정된 분이 바로 그 선배님이었다. 원근각처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강당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강사가 강사인만큼 설렘반 기대반으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임의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입구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치고 무엇을 던지는 난리법석의 소리가 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궁금 반 걱정 반 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입구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십 대 청소년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눈동자가 돌아가고 손발을 떨면서 뻣뻣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소년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러는지 두 사람이 진땀을 흘리면서 소년과 필사적인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너무나 당황스럽고 안쓰러운 장면이었다. 그런데 가장 안타까웠고 경악스러운 순간은 바로 두 부부는 ‘선배님’ 부부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늘 항상 근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순풍에 돛 단 배처럼 보였던 그 선배님 부부이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순식간에 신년회 하례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분위기가 수습이 되었고 선배님의 신년회 격려사는 진행이 되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좌불안석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다들 헐레벌떡 자리에 앉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몹시 불안하였다. “과연 이런 아비규환을 겪으면서 선배님이 과연 격려사를 마칠 수가 있을까?”하는 걱정에서 자유로왔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설마 그 와중에?”라고 할 수도 있음을 잘 안다. 그래도 사실이니 믿거나 말거나 한다. 그날 선배님의 강연의 제목은 “입에 재갈 먹여라”이었다. 대충 간추리면 한 마디로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고 함부로 입을 열다 보면 ‘모조리 도루묵’이라 하셨다. 오늘날 우리 안방에, 직장에, 학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웅변이 아니라 경청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조물자가 입은 하나에 두 개의 귀를 주셨음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찌 좋은 날만 있겠느냐 그러나 비록 천부당만부당한 일 또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사사로이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 하셨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씨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말은 부메랑과 같은데 내가 축복의 말을 하면 나에게 축복으로 돌아오고, 내가 저주의 말을 하면 나에게 저주로 돌아옴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내 운명과 환경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소개한 이야기이다. 독수리들은 주로 두루미들을 먹이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두루미는 원래 떠들기를 좋아하는 새라고 합니다. 떼를 지어 산을 넘으며 시끄럽게 떠들다가 그만 독수리의 먹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있는 노련한 두루미들을 이 산을 넘을 때 스스로 자갈을 입에 물고 넘는다고 합니다. 조용히 넘기 위해 서지요. 그래서 노련한 두루미는 거의 희생을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날 우리는 그 선배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언행일치에 가장 근접한 한 분을 만났던 것이다. 항상 어딜 가나 ‘말하는 재미에 스스로 빠진’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남 말 듣는 재미에 푹 빠진 사람의 무대뒤의 가슴 저린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선배님의 자녀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나? 특별히 남의 흉은 만리를 가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도 이렇게까지 문제가 심각함을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두 부부가 항상 입에 재갈을 먹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보다 천배 만 배나 세상을 향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해야 할 분이었다. 매 순간 내 자식을 보면서 얼마나 억울했을까? 얼마나 하늘에 삿대질을 하고 싶었을까? 그래도 그 선배님은 입에 재갈을 먹이라 하셨고 또 그렇게 몸소 당신의 삶에서 실천을 하였던 것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아도 그렇더라.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입을 다무는 일임을 말이다. 억울할 때에 억울하다고 힘들 때에 힘들어 죽겠다고 원망하고 불평불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우리들은 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되어진 것이다. 그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입 다물고 재갈을 입에 먹이고 살라 권면하시고 또 그렇게 자신의 말대로 살아가신 그분은 남달랐었다. 그날 우리 모두는 다들 그 선배분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다들 손으로 내 입을 때리고 재갈을 먹이고 싶었던 날이었다. 말씀 속에서 고스란히 담겨졌던 두 부부의 내공이 느껴졌고 두 분의 짊어진 삶의 농축되고 응축된 무게가 우리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두 부분의 내공이 언젠가는 우주만물의 법칙 중에서 가장 확실한 법칙 중 하나인 ‘눈물로 뿌리는 씨앗은 반드시 언젠가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법칙의 열매를 맺으리라 확신하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지금 그 선배님은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이 계시지 않기에 나는 그만큼이나 ‘작은 사람’이 되었고 그만큼이나 ‘가난한 영혼’의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내 옆에 계시지는 않지만 여전히 내 삶에서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데 입을 함부로 열면 ‘모조리 도루묵’이 됨을 늘 가슴에 새기게 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일상의 삶의 셈에 다 달인들이다. 그리하여 ‘100’에서 하나를 빼면 ‘99’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다 보니 ‘100’에서 하나를 빼면 ‘0’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더라. ‘100’에서 하나를 뺐는데 남아야 할 ‘99’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반대로 ‘100’에 하나를 더하면 ‘101’ 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100’에 하나를 더하면 ‘200’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더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다. ‘100’이라는 숫자를 깜쪽같이 ‘0’으로 만들기도 하고 또 ‘100’에 하나를 더하면 ‘101’이 아니라 ‘200’으로 둔갑시키는 그 기적 같은 ‘하나’가 도대체 무엇일까? 내 선배님의 말을 빌리자면 그 ‘하나’는 바로 입에 재갈을 먹이는 것이는 것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기다림’, ‘견딤’과 ‘인내’가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만드는 1%이기도 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그렇다. 모든 위대한 것은 다 입에 재갈을 먹일 때이었다. 우리가 위대함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빨리빨리’, ‘날쌔게’, ‘얼른’, ‘금세’, ‘당장’, ‘성큼’, ‘선뜻’, ‘후딱’, ‘속히’, ‘즉시’, ‘신속하게’, ‘잽싸게’ ‘쏜살같이’ ‘숨도 쉬지 말고’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면서 우리의 피땀을 몽땅 도루묵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조개의 눈물’이라고 부르는 진주가 조개에서 만들어지는 인고의 과정을 보라. 한낱 미물인 조개가 침입한 모래알을 도전으로 받아들여 처절한 아픔의 순간에도 자신의 입을 꼭 다물고 인내하는 것이다. 이 견딤의 순간에 조개가 Nacre라는 특수한 물질을 분비해서 모래알을 감싸면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지만 영롱한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삶의 앞에 놓인 시련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내가 입을 다문만큼 또 내가 품고 있는 진주도 더 크고 더 값지게 되는 것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입에 재갈을 먹이면 마침내 세척제 거품에서 무지개를 보게 된다. 그때에 비로소 내 가정의 행복이 저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41대 대통령 조지 부시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자신을 강으로 데리고 가서는 낚시를 가르켰다고 한다. 고기를 잡아서는 아들에게 보이면서 잘 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물고기는 입을 함부 열어서 이렇게 죽는 꼴이 되었음을 말이다. 그때부터 아들 조지 부시는 늘 항상 ‘입조심’이 자신의 삶의 좌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들! 입에 재갈을 먹여라”라는 선배님의 말씀을 생각하다 보면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빈센트 반 고흐 화가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빈센트 반 고흐는 유난히 자신을 작품의 모델로 삼아 그린 자화상이 유독 많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별히 빈센트 고흐 작품은 우리네 가족사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 있는데 바로 자화상에서 고흐는 하나같이 마치 지퍼로 입을 채우기라도 한 듯이 입을 꼭 다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자화상에는 ‘김치 ‘와 ‘치즈’ 같은 그 흔하고 흔한 미소와 입 벌림은 결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고흐라고 왜 할 말이 없었겠는가?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극한의 절망과 척박함 속에서 전설의 화가가 탄생한 것이다. 훗날 천재 화가로 알려졌지만 고흐는 살아생전 화가로서 전혀 인정받지 못했기에 그가 자신의 얼굴을 그리게 된 이유도 바로 가난한 생활로 모델료가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고 한다.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으로 겨우 연명했으며 길지 않은 이 세상의 삶도 조울증, 강박증, 납중독, 마니에르 등 여러 정신질환과 신경증과 끊임없이 투쟁하였다고 한다. 고흐를 스타로 만든 '잘린 귀’도 화가로서의 그의 삶의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암울한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왜 고흐는 '잘린 귀'를 화폭에 담았을까? 훗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위대함을 위해서 입을 다물기 위해서 부질없는 세상의 '잔소리' '헛소리'들과 담을 쌓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의 ‘잘린 귀’ 그리고 굳게 닫힌 입은 그의 심연에서 들끓어 용솟음치는 내면의 내공을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 내공의 힘은 그가 닫힌 입으로 인해서 갑절의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흐의 얼굴을 보면 왠지 성경의 '고난의 달인' ‘욥’을 생각케 된다. 욥이 얼마나 끔찍한 고난을 당했는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 아마 이 순간에 하나님도 숨을 멈추시고 침묵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은 욥을 주시하고 계셨을 것이다. 욥이 뭐라고 답을 할지 얼마나 알고 싶었을까. 성경은 단순히 욥이 “모든 일에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라고 만 기록하고 있다. 역시 욥은 욥이었다. 그리고 욥은 나중에 그 무거운 입덕택에 2배의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내 선배, ‘조개의 눈물’이라고 부르는 진주 그리고 빈센트 고흐를 말하다 보면 우리들의 삶에서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와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뭔가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그저 그냥 하나도 쉽게 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것은 공짜로 된 것이 없으니 내가 진정으로 원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무엇을 하나라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은연중 함부로 별생각 없이 툭 뱉어 버린 말을 내놓으라는 말이다.


제가 좋아하는 김상현의 “노루는 발을 벗어두고”라는 시이다.

“까마득히 어렸을땐

누워서 별을 세고

그보다 조금 커서는

뜨락의 꽃송이를 세고


그리고 어느날 부터서는

돈을세다 늙어 버렸다


가슴에 꽃 시들고

꿈 잃어버린 지금은

그저 가난 할 뿐”


구구절절 내 가슴을 울린다. 별을 세면서 시작된 내 인생이 어떻게 돈을 세다가 끝이 나게 되었는지. “가슴에 꽃 시들고 꿈 잃어버린 지금은 그저 가난할 뿐”이라는 시인의 회한 가득 찬 목소리가 오늘따라 왜 이토록 처절하게 내 가슴에 와닿을 수가 있다는 말일까? 혹시나 회한의 중심에 지난날 내 삶에서 재갈 먹이지 않고 내뱉은 볼멘소리들이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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