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 중요하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아주 오래전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불가항력적인 마력의 힘으로 다가와 성찰과 고찰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별생각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또 마구잡이로 연명하던 네나 내의 인생을 별 생각 있게 또 고민하면서 잠자리에 들게 하였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느 순간부터 내 발걸음이 달라졌고 졸지에 네나 내나 그 문턱 높고 콧대 높다는 철학가와 사상가가 되게 하였다.
특별히 지금 당장, 즉 2024년 1월 27일의 내 삶을 가장 잘 대변하고 상징하는 인생 정의가 하나 있는데 명배우 톰 행크스가 불후의 명작 <포레스트 검프>에서 말했었던 명대사이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뭐가 걸릴지 아무도 모르거든’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ing to get).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맛있고 정감 나는 대사이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어떻게 한 인간의 인생에 웅크리고 있는 복선과 암시를 그토록 적나라하게 담을 수 있을까? 참 기막힌 정의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인가 학교, 결혼, 사업, 직장 또 부모라는 초콜릿 상자를 받는다. 또 십중팔구 출발점에서는 다 내 상자에는 내가 좋아하는 달콤한 초콜릿으로 가득 찰 것이다라는 전혀 근거 없는 희망고문을 가진다. 그런데 이걸 어떡할까? 초콜릿 상자를 향한 낭만투성이의 대책 없는 희망은 눈 깜짝할 새에 대책 없는 절망감으로 돌변하고 만다. 나는 달달한 초콜릿만을 기대했는데 내 상자에는 씁쓸하고 쓴 맛의 초콜릿이 튀어나오기 시작을 한다. 갑자기 자신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허우적 그리고 ‘안절부절’, ‘망연자실’, 하여 마냥 ‘징징’ 또 ‘쩔쩔매는’ 모습만 드러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왜 아무도 나에게 내가 가진 초콜릿 상자에는 쓴 럼주가 든 초콜릿도 있음을 살짝이라도 귀띔해주지 않았다는 말인가?”라는 원망의 소리만 날 감싼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아니면 ‘모르면 약이다’, 또 ‘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했나 보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많아진다. 인생은 매정하고 냉정할 때가 많다. 날벼락과 돌직구를 날리면서도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전혀 그 흔하고 흔한 뷔페식의 취사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먹고 싶은 것만 집어 들고 배를 채우게 하는 인생은 결코 한 번도 없다. 울며 겨자 먹는 셈 치고 내가 가진 초콜릿 상자를 열고 초콜릿 상자 안의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가는 게 인생이다. 그것이 달콤한 초콜릿이든, 쓴 럼주가 든 초콜릿이든, 모두 내가 먹어야 하는 초콜릿이다. 내 인생의 연장전이라는 지금 이 시점에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남은 초콜릿 중에는 더 이상 쓴 럼주가 든 초콜릿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또한 바람뿐이었다. 아직도 내가 받았던 초콜릿 상자에는 내가 지금까지 맛보았던 그 어떤 초콜릿보다 더 쓴 초콜릿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인생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다 보면 내 인생에는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하지 않았던 허탈감과 좌절감으로 휘청거릴 때가 있게 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이들에게 봉투를 하나 받았는데 다름 아니라 건강 종합진단을 받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좋으면 2024년 에는 고향 방문 비행기 표도 준비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있었다. 감개무량이었다. 비록 잠시이었지만 그래도 참 기분 좋은 한 해의 시작이었다. 1994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뚝 끊어진 고향을 향한 짙은 향수가 갑자기 물씬 내 코를 찌르고 있었다. 너무 늦기 전에 고향의 식구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었다. 그런데 역시 2024년이라는 새해에 주어진 내 초콜릿 상자에는 쓰디쓴 맛, 지금까지 내가 맛본 그 어떤 초콜릿보다 차원이 다른 쓴 맛의 초콜릿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내와 나에게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관상동맥 우회수술’ (Coronary Artery Bypass Graft, CABG)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멍해져 있었던 나와 아내에게 이어진 설명이었다. 내 혈관이 깡막혀서 내 몸의 다른 부위에 있는 동맥이나 정맥을 이용하여 협착으로 인해 혈류량이 부족한 부위에 혈류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우회로를 만들어 주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이었다. 그동안 오래전 두 번에 걸쳐서 혈관 협착문제로 스텐트(그물망)을 설치하여 혈관 내경을 넓히는 시술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이상 스텐트로서는 해결이 되지 못하니 막힌 부위를 우회하는 혈관을 만드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보다 더 황당해하고 놀란 것은 내 아내이었고 또 아이들이었다. 특별히 아이들이 어쩔 줄을 모른다. 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선물을 한다며 얼마나 좋아하면서 아버지 몰래 준비를 했는데 그 결과가 전혀 원하지 않게 전개가 되고 만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의 주옥같은 명대사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무엇을 집을지 아무도 모른다’를 생각하면서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불현듯 내 뇌리를 스쳐갔다. 왜일까? 아마도 둘 다 인생의 길흉화복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접촉점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중국 북방의 그 노인이 키우던 한 마리의 말이 도망치게 되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는데 심지어 노인의 아들까지 다리를 다치게 된다. 사람들의 측은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며 마을의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는데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들은 열에 아홉이 죽게 되었는데 불행 중 천만다행히도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친 까닭에 전쟁에 나가지 않아서 무사하게 되었다는 줄거리이다.
한 마디로 이렇듯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좋은 일이 있다고 마냥 기쁨에 들떠 있어도 안 되고, 나쁜 일만 겹친다고 인생을 비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새옹지마’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여러 가지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니 너무 매사에 일희일비, 즉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너무 기뻐 날뛰지도 말고 어려운 일이 닥쳤다고 해서 기가 죽어 축 늘어지지도 말고 좋을 때나 기쁠 때나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심기일전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라는 당부이다. 예부터 명약은 다 쓴맛이었다는 말을 기억한다. 쓴 맛도 뱉지 않고 자꾸 씹다 보면 결국에는 단맛이 나온다고 한 조상들의 지혜가 오늘따라 가슴에 와닿는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p)를 보면서 정말 많이 웃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오늘따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포레스트 검프가 오늘 내 삶의 반면교사가 되고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포레스트 검프는 지능지수가 매우 낮다. IQ가 75이다. 세상의 내로라하는 자들과 경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고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살벌한 세상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기만 하다. 스펙도 학벌도 내놓을 만한 이력서 한장도 없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척추측만증 때문에 다리 보정기를 차고 다녀야 할 형편이다. 할 수 없이 ‘저능아’가 되어서 왕따가 되기에 주위 아이들의 괴롭힘을 한 몸으로 받아야 할 팔자이다. 살기 위해 늘 달려야 할 딱한 형편의 삶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의 궤도는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달리다가 우연찮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식축구 특기생으로 앨라바마 대학에 입학한다. 또 우연찮게 앨라바마 대학에 재학 도중 자신이 속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대업적을 세우고 또 졸업 한 이후에 그는 군에 자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정말로 우연찮게 부상당한 친구를 구하게 되는데 이 역시 그가 누구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재능 덕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IQ 75저능아’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이 정말이지 너무나 우습게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된다. 부상당한 친구를 구하다 엉덩이에 부상을 당한 포레스트 검프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전혀 뜻하지 않게 자신의 새로운 소질인 탁구를 배우게 된다. 공을 치기만 하면 되는 탁구에 흥미를 붙인 포레스트는 그 길 선상에서 탁구로 중국과의 핑퐁외교의 주역이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어떻게 IQ 75 포레스트가 늘 성공하고, 어느 자리에서나 최고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포레스트는 주변인들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고 달리는 것이다. 결국에는 전역한 뒤엔 ‘애플’에 투자해 큰 사업가가 되는 일생일대의 전대미문의 위대한 업적을 세운다.
그의 성공을 일찍이 점치게 한 순간이다. 입대한 뒤 훈련 교관이 '자넨 왜 입대했나!' 하고 우악스럽게 묻자 IQ 75 저능안 포레스트 검프가 고함을 치면서 응답을 한다. 내 나름대로 의역을 하면 "상사님이 하라고 하시는 건 그게 뭐든지 간에 하려고입니다"이다. 물론 이에 교관이 매우 흡족해하며 '빌어먹을! 최고의 답변이었다!(God damn it, Gump. You're god damn genius. That's the most outstanding answer I've ever heard.”라고 응수한다. 영화 포리스트 검프는 오늘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나 싶다. 내가 어떤 초콜릿을 선택하든 불평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그 쓰디쓴 초콜릿을 음미하며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말이지 언젠가 때가 차면 쓰디쓴 우연처럼 보이는 내 삶의 순간들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펼쳐지며 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필연의 천을 만듬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나에게 오늘 새해에 나에게 주어진 내 인생이라는 초콜릿 상자에 있었던 쓰디쓴 초콜릿에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고 순순히 이 또한 앞날을 향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라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눈 팔지 말고 또 너무 앞서지 말고 오늘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달리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제 생애를 변화시킨 짧지만 내 한때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고, 깊은 깨달음을 준 칼 메닝거의 글이 불현듯 내 뇌리를 스쳐가는데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라는 말이다. 그렇다. 내 인생의 쓴맛이라는 사건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 사건은 내 손으로 벗어난 것이고 그래서 어떻게 조금도 바꿀 수가 없다. 하지만 눈앞에 일어난 사건을 (쓴 초콜릿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향방을 결정할 수는 있는 것이다.
기억하자. 사건은 단지 중립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건에 여러 가지 이름들 (실패, 실수, 고난, 고통, 역경, 시련, 버림받음 등) 을 함부로 갖다 대면서 사건에 노예가 되기도 하고 또 사건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못된 병에 걸려야 해?”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해?”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해?”라는 여러 갈래의 해석에 따라서 똑같은 상황이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삶의 덫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예를 들면, 물이 반쯤 담긴 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 차 있다”로,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 비었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 나무에 앉아 지저귀는 새를 보고, “새가 노래한다”라고 하기도 하고, “새가 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해석하는 사람의 배경, 경험과 가치관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오늘 이 글의 재목을 나는 “내 인생은 사건 11%와 그 사건을 대하는 내 반응 89%로 이루어진다”라고 했다. 이런 질문이 있을 수가 있다. 도대체가 어떤 근거로 ‘11%’라는 말과 ‘89%’라는 참으로 알쏭달쏭하기만 하고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숫자를 언급했을까? 간단한 배경 설명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군대에서 신병 훈련을 했었던 젊은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어깨너머 주워 들었다. 훈련에서 11m에서 뛰어내리게 하는 구간이 있다고 한다. 왜 11m 일까? 인간이 제일 두려워하는 높이가 ‘11미터’라고 한다. 즉 내 삶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바로 일어난 어떤 사건 ‘11%’ 그 자체이다. 그런데 그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사건에 대한 내 반응이고 그 반응이 ‘89%’라는 어마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11%’는 내 몫이 아니다. 내 몫은 ‘89%’이다. 그냥 달리는 것이다. 앞만 보고 말이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말이다.
쓰디쓴 초콜릿에 직면하면서 이 고난의 시간에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리라 다짐해 본다. 그동안 나름대로 정신없이 살아왔었다. 만만하지 않았고 결코 녹록하지 않았던 이민 생활이었다. 갈길이 요원하여서 여전히 내 마음은 바쁘기만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직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내 생각을 어지럽히고 있기만 하다. 초콜릿 상자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쓴 초콜릿은 달리기만 하고 살아왔던 내 삶에 귀중한 브레이크를 거는 것과 같다.
끝으로 혹시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내가 겪는 ‘엄동설한’을 보내고 있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진다면 이렇게 귀에다 속삭이고 싶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아서 무엇을 집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다. ‘삶의 풍요로움과 가치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은 고통과 뼈아픈 고뇌 속에도 존재한다.’라고 말이다.
훗날 남은 삶이 허락한다면 우리 함께 '사치로운' 건배를 한번 나누자. 마침내 갑자기 들어 닥친 인생의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처럼 의연하게, 또 눈을 털고 일어서는 매화처럼 고고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게 금상첨화의 삶이 아닐까?